늘 가슴 한편이 허전했다. 무엇이 빠진 것일까? 영혼의 빈곤을 채워줄 변화가 절실했다. 2014년, 마흔 살 무렵 아이가 생기면서 나는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영혼이 충만한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 해답을 ‘자연’에서 찾았다. 자연과 함께한다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삶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듯싶었다. 마당에 작은 텃밭을 일구며 아이에게도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삭막한 아파트 숲에서 아이가 성장하도록 내버려두기는 싫었다. 그건 많이 미안한 일이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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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문해 보니 내 땅이 위치한 계곡의 옛 지명은 ‘소리울’이었다. 소나무가 울창한 곳이라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농지이지만, 마을 사람들 말로는 한때는 몇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도 했다. 마을의 흔적인지 계곡 위쪽 산기슭에 두 세대가 살고 있었다. 두 곳 모두 은퇴한 노부부가 거주하고 있었다. 한 집은 아담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철제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허술한 건물이었다. 농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두 집 주위로 3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메타세쿼이아 나무 몇 그루가 수호자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메타세쿼이아는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으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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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땅을 ‘또 다른 고향’으로 만들고 싶었다. 부모님, 형제들과 함께 농사를 짓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주말만이라도 행복한 그 시절을 다시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추억의 유실수와 채마, 화초를 심고 아이에게도 나의 유년 시절을 선물처럼 건네주는 장밋빛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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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계획한 주말 자연인의 삶은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최대한 생태적으로 살아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태적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자연과 교감하며 호혜적 관계를 유지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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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나는 ‘자연’이라는 ‘살아 있는 신’을 경험한다. 신을 경험하는 자에게 신은 틀림없이 실재한다. 그러나 신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불가지(不可知)의 대상이다. 하느님을 경험하는 자 곁에 하느님이 함께하며, 여호와는 여호와를 느끼는 이와 어깨를 곁는다. 다르마를 체감하는 사람의 영육에는 부처가 깃들인다. 신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을 배반하고 있다. 생태계 훼손이 바로 신을 밀어내는 행위이다. 나의 텃밭 농사는 신을 돌보며 신께 감사하는 신성한 의식이다. 이때 신은 내 곁에 가장 가까이 머문다. 하느님, 여호와, 알라, 불교의 다르마(Dharma), 유교의 이(理), 도교의 도(道)……. 인류가 경험하는 그 모든 절대적 존재와 섭리는 우주와 자연이라는 무한(無限)과 영원(永遠)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종교 논쟁이나 종교 전쟁처럼 어리석고 소모적인 것도 없다. 타자의 신념을 존중하지 못하는 신념은 아집과 독선일 뿐이다. 다산 선생과 혜장 스님,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아름다운 대화와 교류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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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3월은 삽질이 가능한 달이다. 나의 봄은 삽질과 함께 시작한다. 대개 우수와 경칩 사이에 삽날 끝을 이랑에 꽂고 삽날 위에 발을 올려 꾹 눌러본다. 삽날이 흙 속으로 쑤욱 들어가면 봄이 왔다는 증거이다. 꽝꽝 얼어붙었던 땅속까지 풀린 것이다. 날아갈 듯이 기쁘다. 이제 봄 텃밭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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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은 처연하다. 바람이 불면 찢어질 듯 위태롭게 얇은 꽃잎, 간신히 붉은 빛깔. 누군가 울고 있는 것만 같다. 춘분에서 청명 사이 진달래 우련 붉은 꽃이 피면 밤새들이 애달프게 울어댄다. 첫 손님이 소쩍새다. ‘소쩍 소쩍’ 두 음절이나, ‘소쩍다 소쩍다’ 세 음절로 슬픔을 뱉어낸다. 밤새도록 울어대는데 저러다가 피라도 토하고 죽을 것처럼 절절하다. 옛사람들은 소쩍새가 밤새 울며 토해낸 피가 진달래꽃을 붉게 물들인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리하여 진달래에 붙여준 이름이 두견화이다. 소쩍새꽃이라는 것이다. 울음소리가 워낙 애틋한 탓에 망제의 전설 같은 슬픈 이야기가 소쩍새에게는 많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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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뉴월 여름이 성큼 다가오면 밤 숲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쏘쏘 쏘쏘 쏘쏘 하며 혀를 차는 듯한 특이한 소리이다. 그 소리가 마치 머슴이 소를 모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고향에서는 쏙독새를 ‘머슴새’라 불렀다. 벼농사를 시작하면서 논을 갈기 위해 농부들이 소를 몰고 이 논 저 논으로 옮겨 다닐 무렵 쏙독새의 울음소리도 최고조에 달했다. 저녁 늦게까지 일하다가 어둑한 농로를 따라 소를 몰아 돌아가노라면 머슴새가 머리 위로 쏘쏘 쏘쏘 쏘쏘 소를 몰아갔다. 우리 동네에는 전설이 전해졌다. 머슴이 캄캄해질 때까지 논에서 일하다가 소를 몰고 귀가하던 길에 벼랑길에서 떨어져 죽어 쏙독새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유독 그 벼랑길 근처에서 쏙독새 소리가 자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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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림의 계절이다. 풀과의 전쟁, 벌레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 텃밭은 순식간에 정글로 변해버린다. 마사토가 빗물을 흠씬 빨아들여 바닥이 온통 진창이다. 잡초들은 허리 높이로 우거지고, 성장세가 좋은 돼지감자 줄기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긴다. 잠깐 방심하는 사이 풀들이 작물들을 뒤덮는다. 모기, 쉬파리, 각다귀 갖가지 날것들은 물론 뱀, 장지뱀, 개구리, 육상플라나리아, 그리고 직박구리와 물까치 등 온갖 생명체들이 들끓는다.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벌레들도 나타난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뱀의 꼬리를 밟는 일도 생길 듯하다. 물 지옥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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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돗자리에 등을 대고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아 저 별처럼 무수한 풀벌레들이 숲속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구나. 풀벌레 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 간다. 그것은 바닷물처럼 출렁이며 차오른다. 나는 어느새 풀벌레 소리의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다. 이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저 밤하늘의 별만큼 헤아릴 수 없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단조로운 소리가 아니다. 갖가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천상의 악기들이 숲속에 감춰져 있는 듯하다. 숲의 모든 곤충들은 천상의 악사들이다. 저 풀숲에서 별처럼 빛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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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는 특이하게도 하과(夏課)와 추과(秋果)가 있다. 중부에서 수확하는 열매는 대부분 본열매인 추과이다. 하과는 브레바(breba)라고 하는데 지난해의 열매눈에서 맺힌 묵은 열매이다. 다시 말해 작년에 성장했어야 하는 열매눈이 늦잠을 자다가 올해 깨어나 익은 것이다.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는 7월에 상당량을 수확할 수 있지만 추운 중부에서는 어렵다. 다만 중부지방에도 비닐하우스 안에 묵은 가지를 남겨 보온을 잘 해주면 열매를 얻을 수 있다. 나도 운이 좋은 해는 하과를 몇 알 얻는다. 내 비닐하우스 안에서 하과는 대개 7월 하순이나 8월 상순에 익는다. 같은 나무에서 열려도 하과는 추과보다 맛이 떨어진다. 그러나 추과와는 다른 개성적인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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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새들의 둥지가 보인다. 아 여기다가 둥지를 틀었었구나!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떨기나무 숲속, 울타리의 자두나무 가지 위에, 농로 가의 단풍나무 가지 위에, 오솔길 위로 뻗은 고로쇠나무 가지 위에……. 무성한 나뭇잎에 감춰져 보이지 않던 둥지들이 훤하게 드러나 있다. 주로 흔히 보이는 뱁새, 직박구리, 물까치, 멧비둘기, 지빠귀류 등의 둥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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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텃밭을 찾았다. 동화의 나라처럼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동심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을 밟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들녘을 헤맸다. 마침내는 체온이 떨어져 으슬으슬 추웠다. 황급히 밭으로 돌아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쨍한 햇볕에 공기가 따듯하게 데워져 있었다. 우연히 귀퉁이의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였다. 글씨가 적혀 있다! 어? Merry Christmas! 인가? 분명 거미줄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샬롯이 나에게 남긴 성탄 엽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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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추종자들은 소외를 거부한다. 그들은 스스로 흙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작물을 돌보고 수확하여 요리해서 먹고 싶어 한다. 음식의 즐거움은 입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음식과 합일하는 깊은 즐거움은 흙에서부터 시작한다. 흙을 뚫고 올라오는 가냘프면서 강인한 새싹, 손바닥처럼 펼쳐지는 푸른 잎, 잘라도 잘라도 다시 채워지는 마법같은 생명력. 음식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삶은 작물의 성장과 재생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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