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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철학

: 모면할 길 없는 기후위기 시대의 삶에 부침

리뷰 총점8.0 리뷰 2건 | 판매지수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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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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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년 07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416쪽 | 148*220*20mm
ISBN13 9788976828606
ISBN10 8976828607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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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오래된 사원 벽을 가르며 거대하게 자란 나무는, 톱질에 그저 리그닌(lignin)의 단단한 목질로 버티는 수동적 저항 이상으로 나무가 강력한 주어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목이 잘린 채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닭은, 그렇게 도망치고 생존하려는 힘만큼의 주어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목이 잘리기 전부터 닭은 그런 주어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도, 대기도, 흙도, 물도, 빙하도, 바람도, 돌도, 나무도 모두 그 나름의 힘을 갖고 행동하는 주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작용하는 힘만큼 어떤 행동의 주어다. 인간 혹은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만이 행동이라 하는 것은 이동이 곧 운동이라 믿는 소박한 동물 중심적 단견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이 주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모습대로만 세상을 보는 인간 중심적 고질병이다.
--- p.8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은 인간이 장악했다고 믿었던 ‘자연’조차 실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에 입혀 놓은 헐렁한 옷이었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인간의 지성이 재봉한 옷이 찢어지며 그 안의 속살이 일부 드러난 사건이었다. 원자로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 후쿠시마 원전의 연료봉과 그걸 냉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거대한 양의 오염수는, 어떤 핑계로 어떻게 ‘처리’하든 사실은 인간이 끝내 제거할 수 없는, 결국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부 아닌가. ‘희석’해 처리한다 하지만 그건 물에 타서 바다에 버린다는 말 아닌가? 굳이 지구의 관점에 서지 않아도 바닷물을 타서 바다에 버리는 게 그냥 바다에 버리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 p.38

분명한 것은 정치(폴리스, polis)에 참여할 ‘자격’을 묻는 사고방식은 민주주의와는 반대 방향으로 정치를 돌려놓는다는 사실이다. 자격 없는 자들을 정치로부터 배제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강조하듯이 데모크라시의 데모스는 ‘자격 없는 자들’이다. 긍정적 의미의 민주주의란 자격 없는 자들의 정치다. 자격을 문제 삼지 않는 정치, 자격이란 게 따로 없었던 시절의 정치다. 따라서 그것은 분명 ‘정치’라는 말이 따로 출현하기 이전에 있었던 것일 게다. 그런 말들이 따로 존재한다 함은 정치라는 테두리 안팎을 가르는 경계와 자격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치란 애초에 거기 참여할 자격이 따로 없던 시기에 이미 시작된다는 것, 그것이 기원의 향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갈 때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도 민주주의도 아렌트가 강조하듯 참여할 자격이 명확하게 제한되어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나 데모크라티아를 모델로 삼아선 안 된다. 전제정이나 귀족정과 대비되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말하려면, 오히려 자격 이전의 정치로 밀고 가야 한다. ‘폴리스’ 이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 이전의 민주주의로 눈을 돌려야 한다. 국가권력이 출현하기 이전, ‘정치’라는 말도 없이 작동했던 정치로.
--- p.81

먹이를 요구하는 고양이의 몸짓과 소리, 낯선 누군가 왔으니 조심하자는 개의 소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과 눈빛, 아무리 헤엄쳐도 기어 올라갈 얼음이 보이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는 북극곰의 동작, 물이 필요하다며 잎의 일부를 변색시키는 식물의 행위 등은 모두 어떤 사안에 대해 그들이 인간을 ‘토론’으로, 정치의 장으로 불러내려는 행동이다. 인간들 또한 그들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들인다. 어떤 동물과 동맹해 어떤 동물과 ‘전쟁’을 할 것인지, 어떤 식물과 동맹해 어떤 식물들을 제거하는 전쟁을 할 것인지, 또 어떤 목표를 위해 어떤 사물의 협조를 구할 것인지 등등. 이 모든 일이 자연의 정치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이런 활동을 굳이 그리스의 폴리스와 구별해 ‘오이코스’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치란 폴리스라는 별도의 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일상의 오이코스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 오이코스야말로 ‘정치’ 이전에 존재하던 정치의 장이었다고 해야 한다. 정치는 폴리스가 아니라 오이코스를 기원으로 한다고. 오이코스란 자연의 정치가 말없이 시작되는 정치의 기원이다.
--- p.86~87

“노예를 지배하는 것은 필연성을 지배하는 인간적 방식이고 따라서 자연에 반하지 않는다”라는 그리스인의 말에서 ‘노예’ 대신 ‘비인간’을 쓴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현대를 사는 우리가 노예제에 대한 이 정당화 논리를 순순히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노예가 아니라 비인간이라면 그리 낯선 논리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노예도 없고 여성과 어린이를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지만, 식물, 동물, 기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과거에 노예와 아이, 여성이 속했던 오이코스와 그들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폴리스 구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구분은 인간들만의 좋은 삶을 위해 인간 아닌 것들을 인간의 노예로 삼는 정치적 경계선이다. 기후 격변은 어쩌면 인간이란 이름으로 자명하다 간주되는 이러한 ‘기만’의 정치학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징표 아닐까?
--- p.190

인류세는 인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증식의 치안이 지구적 수준에서 네크로폴리스의 문턱을 넘은 시대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세는 네크로폴리스의 시대다. 인간에 의한 증식의 치안이 지구적 수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장을 만들어 낸 시대다. 네크로폴리스라는 개념이 표현하는 인류세의 치명적 역설은 증식의 주어인 우리 인간이 그 거대한 네크로폴리스의 장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네크로폴리스가 인간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란 인간 아닌 것들을 수단으로 삼을 뿐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특권적 권력을 가진 자라는 인간학적 자명성 속에 있는 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턱을 넘어선 네크로폴리스의 권력이 자신 또한 겨누고 있다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까지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인간’이란 관념이 문제화됨에 따라, 인간 아닌 것의 눈으로 인간 자신을 보게 됨에 따라 그러한 사태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의 문턱을 넘은 것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보게 된 것이다. 기후위기의 원인도 알고 해결책도 알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네크로폴리스의 힘은 이미 우리 인간의 손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고 가속시킨 네크로폴리스의 장 안에 있는 것이다.
--- 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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