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일들과 엄마로서 느끼는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엄마의 역할을 다하고 난 후 다시 나 개인의 쓸모를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 기이다. 이 세상 모든 생물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유한한 시간이 주어지고, 산다는 것은 아마도 그 유한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나의 쓰임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 아닐는지.
--- p.9
발 디딜 곳을 잃어가는 북극곰, 플라스틱과 비닐을 삼키며 죽어간 바다생물들의 사진을 보고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내아이들이 “엄마, 그때 왜 그렇게 많은 플라스틱을 생산했던 거야?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이렇게 위협하게 될 줄 정말 몰랐던 거야?”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뒤늦은 후회만 잔뜩 늘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할 것인가? 변변치 않더라도 그 물음에 내놓을 만한 대답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제제상회가 재재프로젝트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 p.62
많이 판매하는 것보다 매달 재료가 버려 지는 만큼만 만들고 재고를 남기지 않는 것이 목표이다. 쓰레 기에 노동력을 더해 더 비싼 쓰레기를 만들지는 말아야 하기에. 오히려 인화지 봉투 수거량이 점차 줄어들자 생산량도 날이 갈수록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불편한 방법으로 사진을 찍지 않고 필름과 인화지도 언젠가는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프로젝트의 모든 제품은 처음부터 대량생산할 수 없는 핸디캡을 안고 시작했으며, 이 제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곧 사진을 인화하여 물리적인 형태로 간직하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p.68
우리는 늘 필요에 의해 물건을 산다. 그 후 알맹이는 취하고 껍데기를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껍데기는 알맹이를 보호함과 동시에 그 알맹이가 판매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치루는 물건값에는 사실 껍데기에 대한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인화지 봉투는 일반 소비자들을 설득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봉투의 역할은 훨씬 단순하 다. 오로지 온도와 습도, 그리고 빛에 약한 인화지를 보호하는 기능만 존재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좋았다. (중략) 이 제품은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로 만들어 졌지만,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가 된다. 껍데기와 알맹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 p.70
방수 테스트는 완전히 실패했다. 프라이탁을 따라 해보겠다는 접근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소재 그대로의 느낌이 좋아 시작한 일이 아닌가. 프라이탁은 그들의 길을 가면 되고, 나는 나만의 길을 가면 된다. 다행히 우리나 라는 스위스보다 강수량이 훨씬 적지 않나.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원점에 섰다.
--- p.74
불필요한 송장도 붙이기 싫어 초반에는 주소를 일일이 손 글씨로 써서 보냈는데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쓸 때면 꼭 편지를 쓰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마지막으로 상자의 겉면에는 고유의 제작 번호를 새겨 넣었다. 유통기한이 없는 가방이지만 인화지 봉투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제작 연도를 기록해두기 위함이다. 재재프로젝트라는 브랜드가 왜 탄생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제작했는지, 소비자의 손에 닿는 순간까지 나의 진심이 오롯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 p.87
내 인생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내가 살 집을 내가 한번 지어 보는 것. 본격적으로 건축공사가 시작되면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에 갔다. 평소에도 건축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건축과 관련한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새참을 핑계로 들르기도 하고 주변 정리도 틈틈이 하면서 여기저기 흩어진 폐기물을 모아 분류해서 버리기도 하고 같은 자재끼리 모아 정리해놓기도 했다. 크게 노하우가 필요 없고 누구나 눈으로 보면 할 수 있는 일들을 일부러 찾아서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작업자분들과 함께하다 보면 현장 피드백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도 있고 각기 다른 공정 베테랑분들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 p.125.
나물 한 뿌리, 열매 하나 자연에서 거저 얻어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늘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어 경제력이 감소했을 때도 당황하지 않도록 검소함을 습관화하고자 애쓰는 편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많은 것을 누린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행복한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다섯 식구 먹고 살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하지만 돈만 쫓는 삶은 살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한다.
--- p.137
할머니의 노고와 정성이 가득했던 매 끼니의 밥상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내가 받은 끼니만큼 아이들 에게도 차려내는 것이 곧 나의 소명이라 여기며 부지런히 밥을 짓는다.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은 약이나 진배없다. 세균과 바이러스가 몸속에 쳐들어와도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병사들을 온몸 구석구석 심어둔다는 전략으로 부엌에 머무는 편인데 그런 마음으로 부엌에 있다 보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리 고된 일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 p.146
맛있게 밥을 먹던 아이들이 그런 나의 눈치를 슬쩍 살핀다. “엄마, 맛이 없어?” “국밥은 맛있는데, 약간 플라스틱 맛이 나.”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플라스틱의 과도한 사용이 일으키는 환경적 부담이나, 분해되는 데 필요한 시간, 소각 시 발행하는 수백 가지의 유해 물질 같은 어려운 설명보다는 기왕이면 아이들의 언어로 쉽게 말해주고 싶다.
--- p.161
나는 살아가는 동안 나무와 식물의 삶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고 싶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가는 것이 어쩌면 앞으로의 내 삶에 이정표가 되어줄 것 같은 막연한 믿음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맨손으로 흙을 만질 때면 기분이 너무 좋다. 할머니에겐 생명을 이어주는 풀이었고 나에겐 자연의 깨달음을 일깨워주는 식물. 식물의 이름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종종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어떤 책에서 ‘몸은 한 사람의 지나온 시간이 축적되어 있는 섬이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나의 몸 어딘가에는 할머니의 서사도 분명 섬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 p.179
여태껏 아이들을 돌보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강인한 야생의 식물들을 더 자세히 관찰하며 살아볼 참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뿌리가 있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더 심는 일을 시작했다. 나무를 베고 풀을 짓밟는 사람이 있다면 심고 가꾸는 사람도 있어야 균형을 잃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삭막한 일상에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조금씩 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산들’이라 이름 지었다.
---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