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의 중대한 전환을 겪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독이 되는, 즉 자신과 돈과 권력을 숭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의 토양에서 우리가 자랐다면, 특히 더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된 세상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오래된 세상이라는 거름에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심으면서도 우리가 아직도 그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오는지는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상주의자이고 위선자일지라도,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와 세상을 위한 희망은 여전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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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도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우리가 사는 방식 사이의 큰 간격을 함께 살면서 발견하고, 더욱이 우리가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위선자들의 회복을 위한 지지 모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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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의 이상을 버리고 예수님이 거하시는, 우리가 함께했던 부서진 사람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 p.26
우리가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모색할 때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동체적 분별의 문제가 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의도적으로 살지 않는 삶의 영역들은 세상을 닮는 경향이 있습니다.
--- p.33
공동체 개척자들은 공동체를 건설하지 않고, 공동체의 씨앗조차도 심지 않지만, 특정한 사람들과 함께 삶을 공유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가꾸시는 정원을 돌보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 p.34
우리는 죄를 지을 것이고, 용서할 것이며, 죄에 직면할 것이고, 용서받게 될 것이라는 네 가지 기대를 가지고 공동체로 들어가야 한다.
--- p.79
우리는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테오시스) 제자 공동체를 통해 원을 그리며 춤추는 하나님의 자유(페리코레시스)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우리의 여정, 우리의 집, 새로운 세상을 위한 우리의 희망의 모습이다.
--- p.116
신뢰는 어떻게 자라는가? 새로 온 사람은 공동체의 누군가와 갈등을 겪지만, 서로의 말을 잘 들어주는 시간을 통해 화해하게 된다. 신뢰는 시험을 받고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성장한다. 물론 우리 모두가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공동체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유된 상처와 그렇지 않은 상처가 뒤섞인 역사를 가지고 온다. 이 질문은 수련자와 공동체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신뢰의 장벽들을 검토하고 시기적절하게 그것을 직면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운다.
--- p.138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받는지 알 수 있도록 우리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셨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공동체가 이 일을 행할 때 그곳은 땅 위의 하나님 나라가 된다.
--- p.159
우리의 실패는 “비뚤어진 선으로 곧게 쓰시는(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막지는 못한다.
--- p.169
함께 산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거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를 읽는 것이 우리를 선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깊은 소망이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공유하는 삶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 p.180
공동체 모임에서 일치를 지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성령의 일치는 항상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이다.
--- p.206
경청하는 것은 내 마음과 양심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나 자신의 말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상호 복종의 행위이다. 이런 식으로 아무도 옆으로 밀려나 소외되지 않고, 우리 각자는 이제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는 관심과 희망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를 설득할 필요가 없다. 자유로운 개인들을 온전히 참여시켜 목적과 사랑의 일치로 옮기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 p.214
“주님께 귀 기울이기”를 실천하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번 주에는 무엇과 씨름했으며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들었습니까?”라고 물을 자유가 있다. 그 결과 대화는 사회적인 미묘함을 지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두 영혼 사이의 친밀한 나눔의 공간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나우웬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킨다. “침묵 없이는 말이 의미를 잃고, 듣지 않고는 말하는 것이 더 이상 치유할 수 없고, 거리가 없으면 가까움이 치유할 수 없습니다.”
--- p.300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동체에 온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생의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갈 수용과 이해심 있는 친구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온다. ...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 무한하고 공동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우리가 인간에게 집착하고 그들 안에서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를 희망한다면 우리는 공동체라는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 p.302
공동체가 우리 곁에 있지 않거나, 우리가 그곳에 있는 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어려운 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삶과 공동체의 닻인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신뢰할 수 있다.
--- p.304
나는 결혼에 대한 비유가 공동체 서약의 성격을 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공동체를, 예수님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7)라고 하신 안식일에 비교하는 것이 더 나은 비유일 것이다. 공동체의 목적은 그 회원들이 예수님의 더 나은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누군가가 다른 환경에서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소속된 공동체는 이러한 가능성을 처리하는 데 열려 있어야 한다.
--- p.308
하나님의 목적이 지역의 공동체보다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부름을 받는 이유와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둘 다 우리의 제한된 이해 방식으로는 다 이해될 수 없다.
--- p.311
아마도 의도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상에 주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는 깊이 있고 정직한 관계를 맛보고 거기에 중독되어, 그것을 찾을 때까지 더 많은 것을 계속 찾게 되는 것이다.
--- p.317
당신이 “보살피는” 누군가가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공동체에 합류하고, 매일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이 당신에게 “독선”과 “위선”을 포함하여 당신의 잘못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외부 사역이 내부사역이 되는 시점이다. 그때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고, 우리가 달려가고 싶을 때이다. 그때는 우리 자신의 성품이 수술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는 영광이 없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 p.336
현대 사회 운동은 헌신적인 공동체에서 구체화된 평화와 정의의 증인인 예수님의 개인적 제자도를 하나로 모으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태어날 것을 대비해 피조물이 신음하고 내면으로 이동하는 해산의 고통과 같다. 이러한 이유로 질병, 고통, 박해, 교훈적 실패, 공동체를 위한 고통스러운 희생은 모두 의미가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긴급한 요청에 사로잡히고, 고통과 노동 속에서 예언자적 공동체의 탄생을 위해, 새로워진 세상에 대한 희망의 징표에 사로잡히기를 바란다. 그 새로워진 세상의 얼굴은 예수님이시다.
--- p.377
도로시 데이가 시에나의 캐서린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주 말했듯이,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은 천국이다.” 그리고 지상의 천국은, 우리가 확신하는 바와 같이, 팔복처럼 보이고, 예수님처럼 보인다. 좋은 소식은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원무에 동참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 p.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