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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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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308쪽 | 402g | 128*188*20mm
ISBN13 9791198575449
ISBN10 1198575441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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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의 키가 자라자 양초 가게 엘레나라고 말하며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부류도 변해갔다. 엘레나가 어렸을 적에 가장 말이 많았던 아주머니들은 엘레나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양초 가게 엘레나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바로 그 엘레나의 암묵적인 의미도 변했다. 그들은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부모와 함께 있는 엘레나는 모른 척했다. 그러면서도 눈길이 맞으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거나 휘파람을 부는 정도의 일은 때때로 있었다. 엘레나는 슬쩍 웃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모에게는 아무래도 그 모습이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일지도 몰랐지만, 엘레나는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 p.17

“……전부 알고 있어. 네가 스스로 한 말을 분명하게 떠올리라고 네 입으로 직접 말하라는 거야. 빨리 말해봐.”
엘레나는 어쩔 수 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러브레터 따위 하나같이 장황하고 허풍스럽고 자신에게 취해 있어서, 지극히 시시한 사람이라고 해도 러브레터랑 비교하면 훨씬 나아. 멋진 러브레터는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어. 커다란 글씨로 ‘이쪽으로 와요’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얄궂게도 러브레터 쪽이 훨씬 나았어.”
“아아, 아아, 아아.” 프란체스카는 소리를 내어 한숨을 쉬었다. “우쭐해져서는 잘도 그런 경솔한 말을 했구나. ……러브레터를 받는 건 상관없어. 괜찮은 일이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러브레터에 잔뜩 빠져있는 여자처럼, 그렇고 그런 여자처럼 여겨질 거야.”
--- p.29

“길에서 두 사람을 만났어요. 자코모가 성당에 감사 기도를 드리러 가서 양초를 100개나 켰다고 하더군요. 엘레나도 함께 있었습니다. 자코모는 상당히 감격한 것처럼 보였고, 내 손을 잡고는 ‘형님, 엘레나는 순결했습니다’라더군요…….” 곁에서 프란체스카가 “그래”라며 표정을 풀었다. “자코모는 엘레나가 설마…….” 프란체스카도 걱정했던 부분이기는 했지만 루도비코가 무슨 말을 하려 하자 프란체스카가 바로 끊었다. “무슨 말이니? 엘레나는 경솔한 부분은 있지만, 누가 뭐래도 바로 내 딸이야.” 프란체스카가 가슴을 두드렸다. 루도비코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쪽 뺨을 긁었다. “음, 감격을 잘하는 사람 중에 나쁜 남자는 없는 법이지.” 나르디 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엘레나에게는 모든 것이 아주 잘된 일 아닌가.”
--- p.58

“저랑 산드로가 대체 무슨 관계라는 거예요!”
“산드로, 산드로, 그 이름 그만 불러!” 자코모는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잘 들어. 네가 그놈에게 주문한 물건 같은 걸 우리 집 아이에게 줄 것 같아? 그런 걸 물릴 바에는 차라리 숯덩이를 물리겠어.” (…) 엘레나는 너무 억울했다. 게다가 갓난아기 입에 숯이 박혀 괴롭게 우는 모습이 떠올라 그 잔혹함이 마음을 건드려 눈물이 터졌다.
“뭐가 슬퍼서 울어. 울고 싶은 사람은 나라고. 아아아, 시끄러워! 울고 싶으면 그놈에게 가서 울어. 그놈이 기뻐하겠지.” 자코모는 종잡을 수 없는 말을 외치고는 나가버렸다. 엘레나가 부부 싸움을 하며 눈물을 흘린 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그 한 번뿐이었다.
--- pp.74~75

자코모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꽁꽁 묶여 조사실로 끌려갔다. 동기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내는 보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사람의 눈길을 끌어들입니다. 제가 떠나고 나면 분명 접근하는 놈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내가 영원히 나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남겨두고 떠나야만 하는 이상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럴 생각으로 마지막 만남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허락된 자리라고 깨닫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막상 엘레나를 만나고 보니 도저히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11시, 사형 시각은 변경되지 않았다.
--- pp.116~117

사람들의 화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의 보복을 받았다고 사람을 찔러 죽일 정도로 화를 낼까? 테오라는 농촌 마을의 그 불량배는 이쪽 거리에도 종종 어슬렁거리러 왔다고 했다. 엘레나에게 이상한 수작이라도 건 일이 있어서 자코모도 그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테오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누가 뭐라든 이미 죽은 남자였다. 아무튼 죽음을 앞둔 남편에게 코를 물어뜯긴 전대미문의 일을 당한 것은 자코모의 질투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그 엘레나이기 때문이라고, 그녀에게도 그럴만한 일이 있었을 거라며 사람들은 다양하게 쑥덕거렸다. 자코모도 이미 코를 물어뜯은 남편이 아닌 그저 죽은 남자였다. 결국 주역은 코를 물어뜯긴 아내가 되었다.
--- p.123

“……어떤 일을 하면 어음 범죄가 되는 거야?”
“가장 많은 사례는 발행인이 다른 사람의 서명을 사용한 위조 서명이지.”
“그게 발각되면 처형돼?”
“아니야, 그렇게 쉽게 결정 나는 일은 아니야. 부모나 집안에서 전 재산을 내서라도 돈을 갚고 어음을 회수하거든. 무엇보다 목숨이 달린 문제니까. 돈이 마련될 때까지 어떻게든 기다려 달라고 매달리면 의리로 응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지. 이 범죄는 피해자가 고소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아. 처형까지 가는 일은 실제 있었던 범죄의 몇십분의 일 정도로 아주 예외적인 경우일 거야.” ‘그러면 안 되겠네’라고 엘레나는 생각했다. ―그럼 방화뿐이네.
--- p.271

엘레나가 방화의 이유를 깊이 고민하는 것은 방화 그 자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죽고 싶기 때문도 아니고, 어떤 방식이라도 괜찮으니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줬으면 해서도 아니었다. 엘레나 는 벽돌에 고개를 올리고 도끼로 내려쳐진 자코모와 그저 같은 몸이 되고 싶었다. 엘레나는 양손으로 뒷머리를 완전히 빗어 올려봤다. 무척 시원했다.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인가. 그 부분을 도끼로 내려친다. 잘 갈아서 상당히 날카롭고 거기에 더해 무거운 도끼이겠지. 덩치 큰 남자가 양 손으로 그것을 머리 위로 치켜올려 있는 힘껏 내려칠 때 도끼는 공기를 가르며 휙 소리를 낼까. 그리고 그때 자신은 자코모와 처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묶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코모에게 연결되는 것일 뿐이다. 자코모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 pp.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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