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땅끝’이라는 단어를 스바냐서(습 2:11)에서 보면 ‘모든 해변’이다. 그러니 인도네시아 같은 섬나라는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 땅끝이 된다. 예를 들면 수마트라 남부 도시 람뿡의 해변에는 ‘쁘시시르’라는 종족이 살고 있는데, 종족 이름의 뜻 자체가 해변이고, 그런 종족이 사는 곳이 ‘땅끝’이다. 내가 주님의 ‘대위임령’을 따라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을 대상은 그런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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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힘을 더하려는 것은 ‘바벨탑 정신’의 작동일 수 있다. 바벨탑을 세우려던 사람들처럼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벨탑 정신의 반대 정신이 임한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주의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방언을 받은 제자들은 박해를 받고 여기저기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방언을 통해 흩어놓으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언어 때문에 흩어진 바벨탑 사건과 결과는 비슷했지만, 그 정신의 근원은 완전히 정반대에서 온 것이었고 결과도 정반대였다. 사람의 이름이 높아지고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복음 전파를 위해 흩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세계선교운동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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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드는 확신은 “하나님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전히 살아계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비가 오기를 바라든 그치기를 바라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사실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상황과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오래 믿었다면서, 왜 지금도 염려하고 걱정하는가? 그 이유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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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명은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나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므로 사명은 나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삶의 방향이며 나침반이다. 이 사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으로, 나에게 사명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지침은 성경 말씀과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 그리고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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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배를 인도하겠다고 하자 모두 기뻐했는데,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한 그들의 행동이었다. 다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랬다가 30-40분쯤 지나 다시 모였다. 전부 옷을 갈아 입었는지 깔끔해진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예배를 드린다고 삼거리 옆에 있는 강에 목욕하러 다녀온 것이었다. 예배를 드리려면 먼저 몸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것이 황당했고 잠시 실망했는데, 그 이유를 알고 나서 크게 감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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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에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나를 집으로 초청하더니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한 것이다. 집회에선 다른 이슬람 교도들이 서로 지켜보는 분위기 때문에 설교를 듣고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그 말고도 더 있었다고 한다. 나는 무슬림이라 해도 복음에 대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의 본질을 전하지 않아 듣지 못해서 반응하지 않은 것이지, 복음을 전하면 실제로 그런 열매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는 팀을 끌고 가서 고생했다고 생각했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이 그렇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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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세가 한창 깊었던 10월 무렵의 경험이다. 어느 날 온 우주가 작아지고,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환상처럼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한없이 큰 분이시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 환상을 두 번 경험하였다. 이 경험을 한 다음 내게 생긴 변화는 하나님이 너무나 두렵게 느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나를 사랑하시는 좋은 분이라는 느낌은 다 사라지고, 사람이 감당할 수 없도록 무한히 크신 분으로만 느껴졌다. 그때부터 무려 한 달가량 사랑의 하나님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없이 크신 하나님으로만 느껴져 두렵고 힘이 들었다. 11월이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땅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라는 찬송이 계속 반복하여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께서 주신 동산에 땀 흘리며 씨를 뿌리며 /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날 사랑하시는 내 주님께 / 땅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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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선교해야 하는가? 나는 왜 선교사가 되어야 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 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이 인류의 구원이며, 그 계획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맡기신 일이 선교인데, 그 원리와 내용이 다른 데 있지 않고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선교의 기초는 성경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면 성경의 기둥, 뼈대가 선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이 하나님의 계획과 세계선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내용은 내가 선교사로 살아왔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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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과 말세의 징조라는 말씀이다. 물론 그 시와 때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조건처럼 말씀하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아직 남아 있는 미전도종족에 대한 복음화를 완성하는 일은 예수님의 재림에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므로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교위임령(마 28:19-20)의 중심 내용이기도 하다. 구약에서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계획, 곧 예수님의 대속의 대상이 모든 족속에게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말씀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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