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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기억하고 있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

삶창시선-8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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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7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28*205*20mm
ISBN13 9788966551798
ISBN10 896655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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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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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출발 부저 누르려는데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내려 온다
못 본 체 그냥 출발하면 되는데
객실 안은 터질 듯해서 더 태울 수 없는데
다시 출입문을 연다
눈앞에서 열차를 놓쳐
속상해 할 청춘의 아침을 위해
열차 출입문 40개 스크린 도어 40개
튕겨 나올 듯한 80개 문을 연다

어리둥절해 하다
꾸벅 인사를 하고 타는 그에게
부끄러워 부끄러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노동자로
평생 살아왔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지옥철의 문을 한 번 더 열어주는 거였구나
--- 「관악역에서」 전문

74일 동안 광장을 떠돌다가
늦은 여름이 겨울 되어 돌아왔건만
누구 하나 버선발로 뛰어나오지 않는다
등 떠밀려 들어온 바짝 약이 오른 파업 복귀
한 놈만 걸려라 도끼눈 치켜뜨는데
급하게 벗어놓았던 작업복은
자다 나온 듯 뒷머리 긁으며
이제 오냐고 한다
마치 어제저녁 퇴근했다
오늘 다시 출근하는 것처럼
행로수첩도 시간표도 가방도
모두들 제자리에서
까딱 고개만 돌려 맞는다

다시 새벽 출근이 끔찍하기만 한데
지하 구간이 낯설기도 하련만
두어 달 만이니 적응할 시간을 달라고
투정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협박도 하면서
웅크린 마음 펴질 시간이 필요했는데
덜컹이는 운전실
벗어나고만 싶었던 그놈의 운전실을
몸이 먼저 자리 잡고 앉는다
--- 「몸이 기억하고 있다」 전문

아내는 꿈을 꾼다
돈 많이 벌어서
아이들 집 사 주고 차 사 주고
그놈의 돈 때문에
우리 아이들 기죽이고 싶지 않아
사장님인 아내가
기를 쓰고 미싱을 밟아 댄다

수원 정자시장 초입 진로마트 위층
운명철학관 옆 205호
달랑 미싱 한 대 니은바리 한 대
허리 휘게 밟아 댈수록
파랗고 누런 돈 대신
눈치 없는 옷들만
깔깔거리며 쏟아지는
꼼꼼바느질
--- 「꼼꼼바느질」 전문

아야 나가 말이여 가끔 울 집 들다봐 주는 최 서방이 고마운께 맨날 천날 먹는 거라 어짤지 몰라도 된장 한 바가지 퍼졌더만은 무담시 비싼 쇠고기를 한 근 끊어 왔더란 말시 그 귀한 걸 내가 어뜨케 먹거써 긍께 벌초 하니라 욕본 성락이헌티 젔제 그란디 그 담날인가 배 상자를 들고 오드라고 그걸 교회 김 집사님 드렸더만은 시상에나 김을 또 가져다 주시드랑께 그랑께 그 김이 매실이 대불고 매실이 또 한과가 대불더만 한과가 또 사과가 대불었단 말시

그깟 된장 쪼깐 퍼준 것뿐인디 고거시 발이 달렸는가 요것 댔다 조것 댔다 함시롱 자꾸만 돌아댕긴다야 시상 참말로 재미지다 하시는 장모님
--- 「아따 참마로 시상 재미지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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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노동자’가 된 그가 더불어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삶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겸손과 사랑으로 충만한 ‘진짜 노동자의 시’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이름 없는 삶을 좇아 살아왔기에 이제 와서 어떤 세속적 명예나 주목을 바라지도 않는다. 근대 한국의 민주주의는 영웅이 되기를 바랐던 이들에 의해 구축되어 온 게 아니라 그처럼 지극히 낮아지고 평범해지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이들의 헌신에 의해 어렵사리 한 단계 성숙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주 형’이라고 부르며 그의 삶을 따라 배워 온 지난 긴 세월. 나는 그가 김수영 시인이 「거대한 뿌리」에서 얘기한 진짜 ‘강자’일지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내내 행복했었다는 고백도 처음으로 놓아 본다.
-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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