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례가 되어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탁 트인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하얀 가운을 입고 미소 지은 의사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은 내가 작성한 진단표를 살펴보더니, 우울증과 불안증이 주된 증상이고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한, 선생님이 건넨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선생님은 6개월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6개월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외에 불편한 질문은 하지 않자, 내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선생님께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선생님은 수면제가 아닌 우울증과 불안증 약을 처방해 주었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 약들을 빠짐없이 잘 챙겨 먹었다.
그 후, 기적이 일어났다. 약을 복용하는 동안, 나는 잠을 자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완벽히는 아니어도 자고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고마워서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꼬박꼬박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치료를 받은 지 어느새 6년 차가 지나고 있다. 그동안 나에게는 수많은 진단들이 주어졌다.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과수면장애, 성인 ADHD, 기분부전증, 공황장애, 식이장애 등.
나는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다. 치료를 받는 동안 한 번의 자살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치료를 시작한 지 4년이 넘어가면서 내 마음과 정신이 천천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너 요즘 어떠니?”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많이 나았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때때로 잠을 자지 못하거나 극단적으로 며칠 동안 잠만 자는 날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죽고 싶은 날보다 살고 싶은 날이 많아졌고, 과거에 잠식되어 우울 속에서 헤매는 날보다 미래를 꿈꾸며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나는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이 책은 우울증을 극복해 가는 내 개인적인 치료 과정을 담은 것이다.
--- pp.14-15
애인과 나는 그날을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부르며, 매해 그날이 되면 근교로 나들이를 간다.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애인이 준비한 깜짝 선물이란다. ‘다시 태어난 날’ 이후로 나는 생애 느껴보지 못했던 많은 감정들을 경험했다. 사소하고 평범하게만 보였던 일상들의 작은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이 끝나고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강아지와 산책하는 동네 산책로에서, 성실하게 살아낸 하루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도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더 나아가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다시 태어난 날’은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것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도 있었다. 나는 우울증을 극복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님과 상담에서는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기 위해 애썼고, 적절한 약물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지겹게도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과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사과를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내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과거에 방치했던 내 감정과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자 하는 강한 결심을 했다. 그러자 그 결심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애인, 친구들이 내 곁에 있음이 보였다.
--- pp.31-32
나는 현재 처음 정신과를 찾았을 때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증과 불안증이 나아졌고, 식이장애와 수면장애도 내 삶의 질을 저해하는 수준이 완화되었다. 그 외에 공황장애, 성인 ADHD, 알코올 의존증 등 셀 수 없이 많았던 정신병적인 증상들이 많이 호전되었다. 약물 치료를 중단하고 다시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조차 무서울 정도로 예전의 내 모습이 너무 버겁고 힘들다. 약을 평생 먹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내 상태와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더 크다.
혈압에 이상이 생기면 평생 혈압 약을 복용하면서 혈압을 관리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정신병도 단약을 서두를 게 아니라 약을 복용하면서 평생 관리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내 생각을 애인과 친구들에게 전달하니 그들 역시 동의하며 평생 약을 복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응원해 주었다. 병이 있어서 약에 의존한다는 게 나쁠 것은 없으니까.
항상 머리 한편에는 언제쯤 단약을 해야 하나 고민 아닌 고민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단약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그렇다고 정신병이 불치병이라는 뜻은 아니다. 언젠가는 정말로 완치가 되었다면 스스로 치료를 중단할 수도 있지만, 굳이 빠른 시일 내로 이루기 위해 애쓰고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 pp.64-65
우울증에 빠지는 날에는 평소와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우울함이 가실 때까지 누워 있어야지. 그렇게 누워서 짧게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길게는 이틀이나 먹지도 씻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온몸이 납으로 채워진 것처럼 무겁고, 머릿속은 그보다 더 무겁다. 죽고 싶은데 죽을 힘이 없어서 못 죽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정신이 아프고 약해지는 순간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흘러가 버리고, 나는 그 시간을 쫓아가다가 결국 버려지고 만다. 지금이 아침인지, 밤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표류된 듯 나는 그저 있을 뿐이다. 그 우울함이 걷히고 나면 어김없이 휘몰아치는 죄책감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한다. 나는 왜 이 모양이지. 왜 또 시간을 버렸지. 몸살에 걸려서 이틀을 누워 있었다고 하면 납득할 거면서, 우울증 때문에 이틀을 누워 있었다고 하는 건 용납이 안 된다. 나조차도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게 슬프다.
점점 밝아오는 창문을 보며 또다시 우울의 소용돌이가 나를 집어 삼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 우울함에 완전히 빠져 버리기 전에 나는 아마 잠에 들 것이다.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늦은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든 굴러가는 세상에서, 나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 pp.127-128
난 더 이상 죽고 싶지 않고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는 욕구를 이렇게 강하게 느낀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곁을 지켜주고 있는 내 사람들과 함께 건강하게 오래도록 행복하고 싶다. 이제는 행복하고 싶다는 당연한 욕망이 신경에 거슬리거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지금 정말 건강해졌다. 그건 긴 시간 꾸준히 치료한 내 의지 덕분이었다.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고 1년이 지났을 때, 2년이 지나가고 있을 때, 내가 들이는 시간만큼 내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좌절했다. 전혀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고 치료가 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10년이 넘게 앓던 병을 병원 잠깐 다니면서 기적처럼 낫길 바랐던 것이다. 모든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속까지 곪아 있는 병이 하루 이틀 사이에 낫는 일은 세상에 없다. 그러니까 시간은 반드시 충분하게 지나야 한다. 당신이 곪아갔던 그 시간만큼이나 충분히.
나는 아직도 치료 중이다. 완벽하게 나아진다고 한들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재발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다시 치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인생의 커다란 벽을 넘은 기분이다. 처음으로 나 혼자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벅찬 기분을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느껴보길 바라고 또 바란다. 나는 이제야 가장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 pp.139-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