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이 장편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내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 사랑은 기껏 한 달여 이어졌을 뿐이지만 이후로 내 삶은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그를 잃은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스콧과 나. 우리는 결혼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용했을 뿐이다. 스콧이 나를 고향에서 데리고 도망쳐준 대가로 나는 그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다. 그가 혼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24p)
_하성란, 〈젤다와 나〉 중에서
한 소년이 있었어요. 소년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인데 열다섯 살이었어요. 영등포에 있는 무슨 계공,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거기 취직했는데 겨우 삼 개월을 일하고 수은중독으로 죽어버렸어. (…) 그 애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빨리 일어나 학교에 가라는 개그 같은 말을 했대요. 겨우 열다섯 살, 지금까지 살았어도 마흔 살 정도밖에 안 된, 그런 어린애가 수은중독에. 사실 수은중독만이 아니었어. 온산병, 이타이이타이병, 그런 거 들어봤어요? 우린 그 애를 보면서 이상적인 공동체 얘기를 했어요. 아무도 아프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를 세우는 일. (43p)
_강영숙, 〈폴록〉 중에서
“원,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 모양인지. 마마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돌아가신 부원군 대감의 소실이셨으니 대비마마의 서모가 아니시오. 허견, 그 꼴같잖은 얼자가 무슨 권세를 믿고 감히 대비마마의 서모를 때린단 말이오?” 예형과 진웅이 나졸의 말에 반은 수긍하면서도 대꾸를 하지 않는다. ‘꼴같잖은 얼자’가 걸려서다. 자매는, 얼자도 못 되는 얼녀인 것이다. (88p)
_박정애, 〈미인〉 중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어쩔 수 없는 이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믿었다.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믿었다. (…) 그러나 내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메하라 게이이치. 그를 버림으로써 나는 사랑을 잃었고,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었다. (123p)
_조두진, 〈첫사랑〉 중에서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매일매일 내 이야기가 나왔다. 난 괜찮았다. 어차피 텔레비전과 신문은 거짓말투성이니까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나에게 ‘인간’도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역시 괜찮았다. 어차피 세상엔 인간 같은 인간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쳤다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남편과 아빠와 자식을 잃고 미치지 않고 사는 것도 이상한 것 아닐까? (153?154p)
_강병융,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중에서
그 밤으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고, 내가 이해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사라진 건 집이나 약국, 골목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라고. 여기 제 살던 시대를 통째 도둑맞은 사내가 있다고. 그렇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누구의 식민지도 아니고 모던 보이도 없는 그런 시대로 떨어져버린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시대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저 그 시대로부터 내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게 더 간편한 것도 같군요. 그 시대에서 나만 증발해버리면,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무탈하지 않습니까. (158?159p)
_윤고은, 〈다옥정 7번지〉 중에서
윤기의 부고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의 만년필이었다. 재킷 주머니에 늘 단정히 꽂혀 있던 검은색 만년필이 행성처럼 밤새도록 내 주변을 맴돌았다. 종내는 내가 지구이거나 지구본인 듯한 착각이 들었고, 그가 죽은 건지 만년필이 죽은 건지 슬픔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189p)
_조영아, 〈만년필〉 중에서
……모르겠어요.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제가 그날, 거기 있었던 게 맞나요? 동네 애들이 빠짐없이 모두, 303동 옥상에 모여 있었어요? 제 손이…… 우리 발이 정말로 그렇게 움직였나요, 미주 누나를 우리가…… 형사님, 딱 한 번만 솔직하게 얘기해 주세요. 이제 조서도 다 썼고 카메라도 껐잖아요. 그러니까 말해 주세요. 우리가 정말, 구제불능의, 파렴치한 성폭행범이 맞는 건가요? (215p)
_안보윤, 〈소년 7의 고백〉 중에서
“전쟁이구먼.”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네?” “1차 세계대전 때부터 나는 여러 전장을 돌아다녔지.” 알고 있다.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연상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가? 아니지, 짝사랑이었나?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전쟁은…….” 그가 술잔을 비웠다.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이지.” (262p)
_서진, 〈진짜 거짓말〉 중에서
부친이 손을 거두었다. “그래서, 법은 말이다.” 거둔 손의 손가락을 세워 서로 비비며 부친이 말했다. “눈이 먼 것이다.” 부친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도리라 믿을 수도 있고, 이치라 생각할 수도 있고, 약속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들 다 관계없다. 그저.” 잠시 어두침침한 허공을 바라보던 부친이 내게 눈을 돌렸다. “뱉은 말이 아무렇게나 흘러 다니다 산목숨을 덮치는 것이지.” (294p)
_이영훈, 〈상자〉 중에서
이사벨라는 몹시 화가 나서 다시는 패리스를, 아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패리스와 그런 일이 있기 전부터 그녀는 이사도라를 끔직하게 싫어했다. 그녀는 이사도라가 예술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사벨라 앞에서 이사도라 얘기를 꺼낸 남자들은 다시는 이사벨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이사도라가 얼마나 천박한 집안의 출신인지도 알고 있었고, 온갖 남자와 놀아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춤을 출 때마다 허벅지를 다 드러내고, 때로는 가슴까지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이사도라야말로 자신이 어렸을 적 술집에서 보았던 이 빠진 여성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여자가 우리 가문의 아이를 낳는다는 말이냐?” 패리스는 전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327p)
_손보미, 〈고귀한 혈통〉 중에서
“그이가 오늘 한 행동, 잘한 일이라고 말해줘요.” 여사의 말을 들은 ‘군’이 잠시 멈칫했다. ‘군’은 한동안 여사를 바라보다 끝내 머리를 식탁에 처박고 만 ‘서’를 내려다봤다. (…) 떨리는 ‘군’의 음성이 여사의 귀에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군’은 답이 아닌 질문을 꺼냈다. “그게 지금 왜 중요하죠?” ‘군’의 질문에 대한 여사의 답은 확고했다. “잘했다고 믿는 게 중요하니까요.” (361?362p)
_주원규, 〈연애의 실질(?質)〉 중에서
왜 안 죽였어? 전략촌 밖을 돌아다니는 민간인은 사살해도 무방하다는 지침을 우리는 서로에게 다시 상기시켰다. 한 번쯤 안 죽이고 싶었거든. 키스가 장총을 끌어안고 천진하게 대답했다. 얼굴에 화색이 나돌았다. 순간 키스를 뺀 나머지 모두에게 알 수 없는 시기심이 끓어올랐다. (374?375p)
_황현진, 〈키스와 바나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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