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제대로 배우려면 고수로부터 코칭을 받아야 한다. 수영법엔 나름대로 호흡법과 자세가 있다. 호흡과 자세를 배우지 못하면 수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개헤엄과 수영은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기도 역시 이와 같다. 자기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좋지만, 성경과 교회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제대로다. 열두 제자들은 기도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이 있었지만,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길 원했다. 개인의 체험보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은 더 소중하고 의미 있다. 예수님은 기도의 대가시며 영원한 스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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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소리를 들으신다. 말로 드리는 기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갈망, 탄식과 신음까지도 들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뱉은 탄식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셨다(출 2:23-24). 일차적으로 좋은 기도란 자기의 현재 느낌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원초적 언어와 절규는 느끼는 그대로의 날것이기에 점잖지 않고 세련되지 못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감정표출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도가 무기력한 이유는 너무 세련되기 때문은 아닐까. 언제부터인지 많은 기도가 세련된 언어와 교양적인 표현으로 드려진다. 좋은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우아하게 포장되고 다듬어진 기도엔 힘이 없어 보인다. 기도에 매끄러움은 있지만, 야성(野性)과 뜨거움과 간절함이 없다. 반면, 원초적 언어와 절규의 기도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뜨거움과 간절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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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다중적 자아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예컨대, 아버지로, 아들로, 남편으로, 사장으로, 교인으로, 친구로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을 이루는 정체성은 다중적이다. 야곱도 그러했다.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요. 에서의 동생이다. 외삼촌 라반의 조카이며, 레아 라헬의 남편이다. 동시에 여러 자녀의 아버지요 가장이고,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그러나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 기도하며 본질적인 자기 실체 곧 사기꾼 야곱을 본 것이다. 사람은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깊이 숨어 있는 자기의 실체, 즉 진짜 정체성을 볼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얍복강 기도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형의 이름이 무엇이냐’, ‘아버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타인이 아닌 야곱 자신의 이름을 물으셨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기도하면서 자기 이름을 하나님 앞에 아뢰기보다는 형, 동생, 장로, 목사, 집사 등 남의 이름을 들먹인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의 티를 보며, “하나님 저 사람은 이래요, 저래요”라고 타인을 들먹인다. 이런 태도는 진실한 기도의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과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핑계 대고 도피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망하는 길이다.
--- p.126~127
우리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목마름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것을 시원하게 해갈해 줄 물이 세상엔 없다. 혀를 톡 쏘는 탄산음료도, 속을 시원케 하는 아이스커피도,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마약도, 그 무엇도 심령의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소해 줄 것은 없다. 야곱도 형 에서와 20년 넘게 갈등하며 형의 용서에 목말랐다. 20년의 긴 세월이 흘러도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고, 소 양 낙타의 많은 선물과 뇌물로도 그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얍복강에서 기도하던 중에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신비로운 신앙 체험을 한다. 그 이후에 야곱은 무서운 형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다고 놀라운 고백을 한다. 그리고 20년의 목마름이 해소되는 은혜를 경험한다. 우리 모든 인생의 목마름의 근원은 하나님의 부재, 곧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기에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처방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모든 생수의 근원이다.
--- p.196
신앙의 방향성에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나가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혹은 밖에서 안으로 움직이는 역동성이다. 전자가 수직적이라면 후자는 수평적인 구조다. 야곱의 얍복강 기도는 이 두 가지 방향성과 역동성이 동시적으로 있다. 야곱은 땅에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야곱이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으로 체험한 것은 창세기 28장에서 나타난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하란 외갓집으로 도망하던 중에 루스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늘사다리 꿈을 꾸었다.
반면 얍복강 기도는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야곱은 형에 대한 극심한 공포심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간다. 외적 환경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영혼 속에서 브니엘로 만나 주셨다. 야곱은 영혼 깊은 곳에 내주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야곱의 브니엘 체험은 야곱 일생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몸을 가진 인간을 영혼 깊은 곳에서 만나 주실 때, 진짜 만남이 이루어진다. 바울의 탁월한 인간 이해는 인간이란 영혼육(靈魂肉)의 존재라는 것이다.
--- p.226~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