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고 있었는데, 그 도시에 있던 에베소 교회는 이미 어느 정도 병든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과 성도 간에 나누던 뜨거운 사랑은 어느새 그 열기를 잃어버리고 식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적이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핍박을 받거나 환란을 당해 쫓기는 일도 많이 없었습니다. 요한일서 안에 그런 낌새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적은 박해가 아니라 유혹이었습니다. 속에서 무서운 유혹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예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는 유혹, 영의 소욕보다 육신의 정욕을 따르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되니, 성경 말씀이 요구하는 거룩한 생활, 윤리 규범 같은 것이 점점 번거롭고 싫증이 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사랑으로 행하라, 계명을 지켜라, 자기를 깨끗이 하라 등등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살도록 하신 이런 거룩한 규범이 이제는 입에 단 말씀이 아니라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세상을 이길 만한 힘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쉽게 용납하는 죄악을 단호히 물리쳐야 함에도 오히려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영적 침체’라고 부릅니다. 당시 교회가 왜 이와 같은 영적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는지를 진단하려면 본문에 있는 세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 「1. 다시 전하는 영원한 생명」 중에서
베토벤이 완전한 난청에 빠져 암흑 속에서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위대한 걸작을 선사한 곡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제9번 〈합창〉이라고 하는 교향곡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곡을 굉장히 사랑하고 높이 평가합니다만, 저는 대학 시절부터 몇 번 들어보고 나서는 저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감동이 없어요. 그리고 이해를 못 하겠어요. 곡이 너무 이상하고 까다로워요. 그래서 저에게는 뭔가 전달이 안 돼요. 그래서 2~30년 전에 적당히 한두 번 듣고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완전히 케케묵은 작품이 돼버린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1년 전에 한 형제가 저에게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담은 VTR 테이프를 주었습니다. 그 테이프의 화질과 음질은 아주 선명하고 완벽하여, 오리지널과 거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크게 기대하며 그 테이프를 기계에 꽂고 틀었습니다. 테이프에는 미국의 유명한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연주가 담겨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9번 교향곡을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눈을 뗄 수 없는 연주자의 모습, 각각의 연주를 펼치는 멤버들의 열정, 그리고 그 곡에 완전히 빠져 있는 관중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일어나서 그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박수를 치는 관중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 곡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복해서 듣자, 그 곡이 저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땀방울이 툭툭 떨어지면서도 눈을 감고 그야말로 완전히 무아경에 빠져서 지휘하는 번스타인의 모습 속에서 베토벤의 어떤 정신이 느껴졌습니다. 연주되는 곡 속에서 살아있는 맥박을 느낀 것입니다. 저에게 그 곡이 다 살아난 거예요. 번스타인 때문에 다시 살아난 거예요. 그래서 그 뒤로부터 저는 베토벤 곡 하면 9번 교향곡만 듣습니다. 저에게는 완전히 살아난 곡이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서로 사랑하라, 내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이 진부한 교훈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을 때 그 계명이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으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 「5. 사랑과 미움」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짓는 죄와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지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아버지에게 잘못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는 율법을 어기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 상처를 주는 행동입니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지옥에 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셨는데 어떻게 내가 죄를 함부로 범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사랑에 상처를 줄 수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앞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생각하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더러운 사람으로 설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힘이 우리를 스스로 경건하게 만들고, 소망의 힘이 우리가 죄의 유혹으로부터 달아나도록 만듭니다. 이것은 강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감동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힘이 사랑과 소망에서 나옵니다.
--- 「9. 보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다」 중에서
담대하게 구하고, 무엇이든 얻어서 주 안에서 행복을 맛보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항상 감사하고 만족하며 든든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알기 때문에 든든하고, 삐뚤어지거나 왜곡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기도가 막히고, 응답도 없습니다. 주 안에서 내가 살고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체험하지 못하고, 항상 변두리를 맴돌며 불쌍한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얼마나 손해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전기요금 10만 원이 아까워서 내지 않다가, 전기가 끊겨버린 집을 생각해보세요. 그런 사람을 보면 우리는 비웃습니다. 자기는 10만 원을 아꼈다고 생각하지만, 전기가 끊겨서 발생하는 손해는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저 순종하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도 좋아지고,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하는 큰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데 조금 마음 쓰는 것, 돈 좀 쓰는 것, 내가 머리 숙이고 들어가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귀찮고, 자존심을 꺾기 싫어서 고집하다가 기도 응답이 끊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세요. 한전에서 전기를 끊는 것과 하나님이 기도의 통로를 끊어버리는 것, 무엇이 다를까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손해를 알면서도 고집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고, 엄청난 이득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 「12. 사랑하면 구하는 대로 받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