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장 2절 말씀 을 보시면, “성령으로 명하시고” 가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들이 모두 다 “성령을 통하여” 이뤄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연장이기 때문에 ‘성령행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제자를 선발하여 훈련시키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신 다음, 그 사명 감당을 위한 조력자, 곧 곁에서 그들을 도우시는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본격적으로 ‘성령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며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예수님께서 명하신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성자 그리스도의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사역”하시는 것입 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남겨질 그의 제자들에게 ‘성 령 강림’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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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결의 기준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요구하신 성결의 정도가 달랐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로 예루살렘 교회가 태동하는 시기, 곧 신약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철저할 정도로 성결과 순수성을 원하셨습니다.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입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고, 시작이 반이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것입니다. 시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새 시대를 여는 예루살렘 교회가 신약 교회의 시작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부정을 밝히고 그에 따른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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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 덕분이었습니다. 성령은 빌립과 같은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려 주셨고 우리 또한 제2, 제3의 빌립이 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빌립 집사가 세례를 주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성령 강림을 위해 기도하였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완악하고 불순종하는 우리의 마음을 순종과 화평함으로 바꿔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성령님께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항상 우리와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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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물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을 구별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성령이 처음으로 임하여 영적 거듭남을 통해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건입니다. 성령 세례는 물 세례보다 앞설 수도 있고 뒤따라 올 수도 있습니다. 물 세례는 성령 세례의 외적 상징으로 성령을 통해 과거의 죄를 씻고 그 영이 거듭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살아난다는 기독교 구원 진리의 상징입니다. 다만 성령 세례가 없는 물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물 세례를 받지 않고도 성령 세례를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물 세례의 결과로 성령이 임했다는 내용’이 있고, ‘성령이 임한 다음에 물 세례를 금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 p.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그곳이 이전에는 내가 갈 수 없었고, 갈 필요도 없는 곳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제한된 지역적 틀을 깨라고 명하실 때가 있습니다.우리 주님이 하시는 일들 중에 선하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보내실 때는 목적과 선한 뜻이 있습니다. 반대로 나에게 누군가를 보내셨보내실 보내셨을 때도 이유가 있습니다. 을 그것이 일이든 사역이든 사람이든 하다못해 물건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이유가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성령의 보내심성령의 보내심을 받지 못했다면 그들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잘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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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까? 영혼의 유익과 기쁨이 있는 곳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이 세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믿음을 점검하고, 말씀에 근거를 찾아, 영혼의 유익과 기쁨이 있는 곳으로 마음을 모으십시오. 그곳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고, 우리의 생명이 ‘영원의 영역’ 으로 들어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와 함께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p.168
생명의 길이 아무리 좁고 협착하다 해도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별 설교를 통해, 이제 자신을 다시 볼 수 없으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성도를 맡기고 그들을 잘 경성하며 돌보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의 일들을 예고하시고, 바울은 그 예고하심을 미리 알고도 당당히 그 길을 걷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의 마음 상태는 자신이 앞으로 받을 환난과 핍박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서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고생길이 훤하다”라고 예고되었다고 해서 바울의 결정이 바뀌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은 바울이 복음에 매인 삶을 결단하고 그 길을 행할 의지까지 주장하시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당할 어려움에 대한 예고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해 바울은 아랑곳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 p.217
성령이 임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행 1:8). 그리고 세상이 주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동시에 믿음의 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승리를 거두신 예수 안에 거하지 않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교만과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동족 유대인의 위협과 산헤드린 공의회의 공격으로 지친 바울에게 주님께서 ‘담대하라!’고 명령하셨음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담대하라’는 헬라어로 ‘다르세이’입니다. 이는 ‘용기를 내라,’ ‘내적으로 기운을 차리라’는 뜻과 함께 ‘안심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다르세이’라는 말씀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와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며 ‘다르세이,’ 곧 안심하라!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 p.252~253
사도행전 27장 24절 후반절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는 부분을 잘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그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그에게 주었다고 했을 때의 ‘주셨다’는 선물과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에서 유래된 동사 ‘카리조마이’로, ‘값을 받지 않고 거져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배에 탄 자들은 바울이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 바울의 생명이 건짐을 받을 때, 그의 손에 들린 선물도 같이 안전하게 보존되듯, 바울이 그의 사명으로 인해 목숨을 잃지 않을 때 배의 동승자들도 목숨을 잃지 않고 안전할 것입니다.
생명과 결부된 사명을 받은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 은혜는 동승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다의 광풍 속에서도 ‘안심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우리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은혜란 아무리 퍼서 날라도 없어지지 않는 무한하고 광대한 은혜입니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 성령과 동행하는 자들에게 무한하게 부어지며, 그 은혜는 나를 통해 전파됩니다.
--- p.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