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짝퉁 화가다. 남의 작품을 흉내 내면서 먹고사는 아주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다. 나름대로 고민도 많고 위기의식도 느끼며 천직을 붙들고 산다. … 얼마 전 희한한 사건이 언론을 장식한 바 있다. 가짜로 밝혀진 보물. 이제 이런 정도의 제목으로는 그렇게 놀랄만한 일도 아닐 것이다. 비슷한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같은 짝퉁 전문가의 활약상과 관련이 있으니 무시할 수 없다.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지난 20여 년간 육군박물관에서 애지중지하며 소장하고 있던 금고金鼓 한 점, 국가로부터 보물 제864호로 지정받아 글자 그대로의 보물이었다. 이 쇠북은 선조 19년(1586년) 삼도대중군사령선三道大中軍司令船의 지휘용으로 사용되었다는 명문을 지니고 있다. 물경 320년의 세월을 보낸 골동품이었다. 그래서 지난 1986년 3월 국가 지정의 보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웃기는 일, 이 쇠북의 제작연대는 16세기가 아니고 바로 1960년대, 보물은커녕 역사적 평가의 대상에 오를 자격조차 없는 물건이었다.
아니, 보물이 가짜였다니! 놀라지 마시라. 이번 일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바로 1960년대에 이를 만들었던 사람이 발설했기에 문제의 물건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애초 만든 사람의 말에 의하면, 골동품 가게에 팔았던 물건이 어느 날 보니 보물로 둔갑되어 있더라고 했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하기야 지난 1997년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거북선 총통이 가짜라 하여 얼마나 놀랐던가. 범인은 문제의 물건을 바다 속에 남몰래 던져 놓고 뒤에 인양하는 형식의 쇼를 했다. 본인이 넣은 것을 본인이 꺼내 신속하게 국보 지정까지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국보 제274호 귀함별황자총통이 탄생했다. 이 얼마나 시원한 일인가. 가짜로 국보 지정도 받고 이른바 전문가와 대한민국 문화재 담당의 행정체계를 농락했으니! 우리 같은 짝퉁 전문가들은 이 같은 눈속임으로 사회를 속일 때, 매우 상쾌해진다. 물론 거 금도 챙길 수 있으니 더욱 신나는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심심한 사회에 우리 같은 짝퉁 전문가는 화젯거리를 제공하며 삶에 생기를 불어넣지 않는가.”
--- p.248~249
“한국미술사학계의 특징, 아니 병폐 하나를 들자면 ‘전공 울타리’다. 자기 전공만 고집한다. 같은 미술사라 해도 다른 장르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그래서 ‘전공 바보’를 양산하고 있다. 본인 전공만 챙기고 있지 폭넓은 시각을 놓치고 있다. 제일 큰 문제는 ‘시대’다. 고대사 전공은 근현대사와 높은 장벽을 친다. 아니 1910년의 조선왕조 이전 시대와 20세기 이후 근현대 시기와는 상호 쳐다보지도 않는다. 같은 미술사이나 18세기와 20세기는 높은 장벽으로 넘나들지 않는다. 같은 시기 전공이라 해도 장르가 다르면 또 마찬가지다. 회화사 전공과 공예사 전공은 남남 사이다. 조선왕조 시대와 근현대 시대의 불통 관계, 그만큼 한국미술사 연구의 풍요로움을 방해한다. 한국미술사 가운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는 불교미술이다. 사실 불교미술을 이해하지 않고 한국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폭넓게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분야이기 때문 이다. 그런데 미술사학계를 보면 일반미술사와 불교미술사 전공자들 사이에 높은 장벽을 보게 한다. 무슨 답사기가 있다고 하자. 상당 부분 사찰 기행으로 내용을 채운다. 하지만 일반미술사 전공자의 불교미술에 대한 낮은 이해도는 답사 안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종교 문제가 걸려 있다 해도, 한국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불교미술이라는 산맥을 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통섭의 시각에서 한국미술사 연구 자세, 오늘의 우리에게 내려준 과제가 아닐까.”
--- p.12~13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 무무당無無堂이라고 불렸던 45평형 여의도 아파트의 한 화실, 그 벽에 적혀 있던 일종의 절규,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이다. 어쩌면 그대에게도 필요한 말일지 모르겠다. “일어나라!” 아니, “너를 불태워라!” 불태우는 삶,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일까. 무무당의 주인은 최욱경, 그의 이름 앞에 ‘여류화가’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으나 군더더기일 따름이다. ‘여류’ 운운의 관형사보다 어쩌면 ‘요절화가’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최욱경(1940 -1985), 45세, 그리고 요절. 수면제를 다량으로 먹고 이승의 마지막 밤을 보냈기 때문에 자살이 아니냐는 주장도 없지 않다. 이 대목에서 분명한 것은 젊은 나이, 그것도 전성기의 화려한 무대를 접고 이승을 빨리 떠났다는 점이다. 나는 최욱경을 생각할 때마다 조지아 오키프를 함께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1887-1986),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특히 여성화가의 상징적 인물. 미술작품 이외 영화와 전기 출판 등으로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
(…) 오키프는 생애의 후반부를 사막지대에서 흥미로운 그림을 그렸다. 물론 황량한 사막 풍경 이외 동물 두개골 그리고 아름다운 꽃들, 조지아 오키프의 대표적 도상은 이렇게 하여 탄생했다. 화면 가득 채워지는 활짝 핀 꽃송이, 그 화려한 색채와 자신감으로 넘치는 붓질은 오키프 회화세계의 승리였다. 만개한 꽃을 통하여 여성 성기를 연상케 하기도 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현대판 페미니즘으로 해석하게도 한다. 활달한 필치와 대담한 색채 구사, 최욱경 그림의 특징이다. 아니, 조지아 오키프 그림의 특징이다. 최욱경의 연보에 의하면, 1976년 최욱경은 뉴멕시코에서 10개월 정도 거주했다. 그러니까 최욱경은 조지아 오키프의 존재를 알았고, 또 그가 살고있는 산타페Santa Fe에 대한 인지도도 높았을 것이다. 더 단순하게 말하여, 최욱경은 조지아 오키프의 존재를 의식해서 뉴멕시코 생활을 선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욱경의 회화작품에서 조지아 오키프 분위기를 쉽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욱경은 1979년 개인전의 전시 제목을 [뉴멕시코의 인상]이라고 특화시켰다.
--- p.514~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