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영화들에서 움직임을 보인 것은 배우들의 활기 있는 동작만이 아니었다. 이 동작들 뒤에서 바다와 파도, 바람에 흔들리는 잎이 우거진 나뭇가지들, 곤충 한 마리의 비행도 움직임을 보였다. 바로 이것들 자체, 즉 자연의 자발적인 협력이 시네마토그라프 초기에 관객을 매혹시켰다. […] 영상의 서열은 아직 없었다. 움직임의 민주주의였고, 여기서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영화였다.
잘 알려진 이 최초의 경이에, 훨씬 더 명백하면서 비밀스러운 또 다른 경이가 추가될 수 있다. 그것은 이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였다는 점이다.
---「1장 영화가 듣지 못했을 때(1895~1927)」중에서
영상과 소리가 동시에 나온다는 사실은, 심지어 그것이 하루에 수천 번 관찰한 현상이라 해도 애초에 전적으로 자명하지 않았다.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에 나오는 기병처럼, 청각적인 것은 언제나 시각적인 것에 뒤처진다. […] 따라서 소리와 영상이 명백히 하나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 인간 지각의 어림셈에서 비롯되었을 뿐이고, 이런 어림셈이 세계에 대한 우리 경험의 기반이다. 요람에 누워 있는 아이는 처음부터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현상의 동시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영화에서는, 음향효과의 원리 자체가 그렇지만, 시각적인 움직임과 동시에 일어나는 소리가 영상에 자동으로 달라붙는다는 점은 명확하다.
---「3장 발성영화의 탄생인가, 유성영화의 탄생인가?(1927~1935)」중에서
오랫동안 언어 중심적 영화의 가장 인기 있는 소품은 파이프, 시가, 담배였다. […] 담뱃불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동작을 멈추거나, 꽁초를 재떨이에, 신발 밑창에 짓이기거나 달걀프라이에 끄는 것, 이 모든 것이 구두점이고, 언어를 중심에 놓는 행위다. 담배는 순간적으로 말과 같이할 수 없거나 같이하기 힘든 입의 행위를 가리키며 말을 변형시키기 때문이고,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는 말의 단절, 말의 휴지부를 시각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이 말하거나 들을 때, 관객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의 소용돌이를, 말하거나 들은 단어의 시적이고 음악적인 연장처럼 지켜볼 수 있다.
---「5장 ‘텍스트-왕’의 지배(1935~1950)」중에서
대략 1926년과 1933년 사이 발성영화 전환기의 가장 중요한 귀결 중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전까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유동적이었던 촬영과 영사를 초당 24개의 포토그램으로 안정화해야 한다는 필요였다. 이 때문에 시네마토그라프는 시간 기록의 시네마토그라프, 즉 움직임뿐만 아니라 시간을 기록하는 예술이 되었다.
그런데 시간을 고정시킨다는 점을 완전하고도 의식적으로 생각해 이를 극적이고 표현적인 요소로, 완전한 의미에서 예술적 요소로 만든 최초의 영화들, 즉 시간이 몽타주와 음악과 배우의 리듬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면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포함할 만큼 시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최초의 영화들은 오히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나타난다.
---「7장 시간이 견고해지는 데는 시간이 얼마만큼 필요할까?(1950~1975)」중에서
아마도 내가 작곡가이기 때문일 텐데, 공동의 상황으로 모인 가지각색의 사람들의 침묵(그것이 동물적 복종이나 순전한 타성이 아닐 때)만큼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거의 없다. 디지털 사운드 덕분에 실현된 압도적 침묵(물론 아무도 이런 귀결을 미리 계산하거나 고안하지 않았는데도)은, 영화관 상영에서 주의를 파고들고 문장과 단어 사이의 빈 공간을 파고들며, 사람들을 각자 자기 고유의 침묵과 자기 청취의 진실로 돌려보내고 이를 지속되게, 오랫동안 지속되게 할 수 있었다.
---「9장 스피커의 침묵(1990~2003)」중에서
너무 깨끗한 유리로 만들어진 완벽한 수족관을 상상해보자. 이 수족관은 유색 액체로 채워져 있을 때만 테두리가 보일 것이다. 숏은 시공간을 담고 있는 수족관이다. 반면 몇몇 사람이 ‘사운드트랙bande-son’이란 말로 이론화하려 한 것은 테두리가 없고 따라서 일관성이 없다. 즉 어떤 영화의 소리는 미리 존재하는 사운드트랙에 들어 있지 않다. 어떤 영화의 순간에 한두 개의 소리가 동시에 들릴 때, 여기서 열 개나 열다섯 개의 소리도 들릴 수 있다. 소리에 소리의 프레임이 없는 것처럼, 소리의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13장 분리」중에서
말하고 듣고 있으며 어떤 장소에서 서로 마주 보는, A와 B 두사람의 숏/리버스숏 같은 ‘진부한’ 예를 들어보자. 여기서 카메라는 A가 말할 때는 A를 보여주고, 이후 A가 계속 말하고 있을 때 A의 말을 듣고 있는 B를 보여준다. B는 A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고, 이후 B가 말하기 시작한다 등. 이런 숏/리버스숏 장면에서 사람들은, 연이어 선형적 문장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목소리가 들릴 때 이 장면이 시간의 축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시간의 이중화란 개념으로 나는 다음 생각을 제안한다. 즉 듣고 있는 B의 숏은, 또한 A가 말하는 숏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B의 영상으로서 사후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연속과 지연된 동시성 속에서 A가 B를 본 것으로도 보인다.
---「16장 시청각적 프레이징」중에서
분명 연극에 비해 야외는 유성영화의 특권적 공간이다. 사티아지트 레이의 〈대지의 눈물〉(1973)의 탁월한 시작 부분에서 두 젊은 여자가 강에 몸을 담근 채로 서로에게 말을 한다. 인간의 목소리를 세계의 소음 중 하나로 만드는 동안, 모순적이게도 소리 하나가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모든 발성영화가 여기에 있다.
---「20장 말하는 기계」중에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를 예로 들어보면, 이 영화에는 비가 아주 많이 오는데, 특히 로이 배티와 릭 데커드의 최종 결투가 벌어지는 장면이 그렇다. 말, 음악, 전자신호음 등 […] 모든 소리가 바로 빗소리에서 나오거나 빗소리로 되돌아간다.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폴 새먼에 따르면 륏허르 하우어르 자신이 만들어낸 대사)가 리플리컨트 로이 배티가 죽으면서 하는 대사인 것이 공연한 일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서 흘러내리는 빗방울 속에 용해된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순간은 시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빗속의… 눈물처럼.”
---「26장 빗속의 눈물처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