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책들이 다 그러하지만, 공동서신은 이 땅의 교회가 복음의 참된 초월성을 되찾고, 동시에 역사를 새롭게 열어 가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될 성경이다. 바울서신에도 풍성한 진리가 넘치지만, 공동서신 안에도 앞으로 교회가 파낼 금광(金鑛)과 같은 보화들, 퍼 올리면 가뭄의 때를 넉넉히 견디게 할 생수(生水)의 샘들이 많이 널려 있다.
--- 「머리말」 중에서
공동서신을 포함해서 신약 정경의 각 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변하는 사도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교회의 온전한 신앙과 덕과 유익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자신의 문제점이나 병의 원인을 찾고 치유받으며 온전한 교회로 회복된다. 또한 종교개혁의 구호대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돌아가자는 것은 곧 ‘전체 성경으로’(Tota Scriptura) 돌아가자는 의미임을 기억해야 한다. 말하자면 ‘성경으로 돌아가자’ 할 때는, 로마서, 갈라디아서만이 아니라 공동서신으로도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I. 첫 번째 이야기 │ 소외되어 왔지만, 절실히 필요한 공동서신」 중에서
우선, 지금 신약성경 안에 포함된 공동서신은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 이, 삼서 그리고 유다서의 순서로 되어 있다. 왜 이런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가? 이런 순서는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아무렇게나 배열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서신의 경우는 어떤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가? 바울서신에는 왜 로마서가 맨 앞에 나오는가? 로마서가 ‘이신칭의’라는 주제를 선포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서신은 기본적으로 ‘길이’ 순서로, 즉 긴 서신부터 짧은 서신의 순서대로 배열되었다. 로마서가 여타의 바울서신보다 먼저 나오는 이유는 그중에서 가장 길기 때문이다.
--- 「III. 세 번째 이야기 │ 공동서신은 왜 이런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는가?」 중에서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에게 바울의 복음을 ‘새롭게’ 해석해 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미 이런 문제들이 발생했던 초기 교회는, 칭의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을 위해 바울에게 그가 전한 복음을 새롭게 해석해 달라고 요청하기보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직접 이 부분을 보완하고 온전케 하는 가르침을 담아 온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성경에 공동서신이라는 정경모음집이 따로 포함되어 있는 이유라는 것이다.
--- 「IV. 네 번째 이야기 │ 공동서신은 바울서신과 어떤 관계인가?」 중에서
어떤 학자는, 신약 정경에서 사도행전 다음에 공동서신이 먼저 나오는 정경적 순차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자 할 때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은 다음에 공동서신을 먼저 읽고 바울서신을 읽음으로써 이신칭의의 복음을 오해함 없이, 보다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초기 교회의 정통적인 복음 해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J. Painter). 다시 말해서, 신약의 정경은 애초부터 공동서신의 빛 아래에서 바울서신을 읽도록 배열되었다는 것이다. 그럴듯한가?
--- 「V. 다섯 번째 이야기 │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 다음에 공동서신이 먼저 나온다면?」 중에서
사랑에 대한 강조는 요한서신에서 많이 발견되지만(요일 4:7-21), 베드로후서가 강조하는 ‘신적 성품’(벧후 1:4-6)의 절정도 사랑이고,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함도, 새 언약 백성이 그들이 받은 ‘긍휼’을 따라 행하는 긍휼 곧 사랑의 행위이다(약 2:13-26). 무엇보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성도가 인내한다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약 1:12). 그만큼 ‘사랑’은, 요한서신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공동서신의 핵심 주제이다. 만일 바울서신이 ‘믿음’에 대하여 많은 중요한 것들을 가르친다면, 베드로전후서는 ‘소망’을, 그리고 요한서신은 ‘사랑’에 대해 더욱 집중적으로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
--- 「VI. 여섯 번째 이야기 │ 공동서신을 관통하는 ‘일관된 신학’이 있는가?」 중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에 흔들리고 고통받는 교회를 끌어안고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눈물과 탄식, 애통과 간구를 품고, 우리도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편향되고 고정된 시각을 깨뜨리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자신과 교회, 그리고 세상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한없는 하나님의 ‘긍휼’에 참여할 때이다.
--- 「XII. 열두 번째 이야기 │ 공동서신의 말씀이 빚어내는 영성」 중에서
하나님은 빛이시고 사랑이시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그렇게 밝힌다. 그 빛과 사랑 안에서, 교회는 그 아들과 성령으로 충만하다. 요한일서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소유하고 누리는지를 알려 준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그 안에 거하는 삶’이며,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다.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동시에 이 세상의 죄와 죽음과 허무 속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가까이 나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