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의학에서 ‘정상이다’라는 개념이 반드시 ‘건강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상’이란 대다수라는 통계적 개념이고, ‘건강’이란 가치에 기준을 둔 개념이다. 정상이라고 할 때는 양적 개념과 질적 개념을 포괄한다. 양적 개념은 연속적, 통계적 개념으로,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를 정상으로, 현저히 이탈했을 경우를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예컨대, 지적장애는 지능이 평균보다 현저히 저하된 상태를 의미한다.
천재도 지능이 평균에서 현저히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비정상이다. 물론 단순히 지능만으로 지적장애를 정의하지는 않는다. 질적 개념은 불연속적, 본질적 개념이다. 만약 100명 중 90명에게서 결핵균이 나오면 양적 개념에서는 90명이 정상이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비정상이다. 검사실 검사에서 정상 범위에 있다고 반드시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정상의 개념은 건강의 개념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 p.16~17
p.78-79 우울은 비교적 객관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병적 상태에서 일어나는 정서의 병리 현상이며, 통상적으로 생리적인 변화가 동반된다. 그에 비해 슬픔은 인간의 정상적인 정서로서 어떤 중요한 대상을 상실한 후 일정 기간 서러움과 연민을 느끼는 상태다. 우울할 때는 모든 생활이 슬픈 느낌으로 차 있고, 자신감이 없으며 자존감이 저하되어 있다. 삶의 의욕은 저하되고, 생활의 재미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매사가 짐처럼 느껴진다. 정신운동이 지연되어 생각이 잘 되지 않고, 주의집중력이 떨어져 기억력이 저하되며, 미래의 실패에 대한 불안이나 우려 때문에 우유부단해진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피곤함을 느끼고, 소화가 안 되며, 식욕과 체중이 특별한 이유 없이 감소하고 리비도가 저하되어 성욕이 감소해 발기도 힘들어진다. 막연히 몸 여기저기가 아프고,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새벽녘에 잠이 깨서는 다시 잠들기 힘들다. 삶에 대한 희망이 없고 지나간 과거가 자꾸 후회되며, 앞날이 어둡고 불운이 닥칠 것 같은 기분에 젖는다. 스스로 자신은 인생을 즐길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낀다. 어떤 전문가는 우울증에 빠질 경우에 소위 네 가지 맛, 즉 사는 맛, 입맛, 잠자는 맛, 섹스하는 맛이 없어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 p.78~79
우리나라에서 강제입원율과 평균 입원 기간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높고 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신건강 서비스 수준과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권의식이 후진적임을 의미한다. 즉,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나 보호가 병원 중심의 입원 관리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지역사회 내 탈원화 내지 탈시설화를 위한 기반시설이 빈약하고, 병상 가동률을 높이고자 하는 민간의료기관이 입원을 남용하며, 가족들이 입원치료를 선호하는 경향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여기에 더해 정신의료기관과 정신질환자 가족들의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권의식의 결여도 한몫하고 있다.
--- p.189~190
일반적으로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첫째, 충동조절이 안 되어서 자신이나 타인을 위해할 가능성이 높을 때, 둘째, 가정이나 직장 또는 대인관계와 같은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힘들 정도로 사회적 기능에 지장이 있을 때, 셋째, 수면-각성 주기나 섭식 또는 성기능과 같은 생체 기능에 현저한 장애가 있을 때 등이다. 일상생활에 위급한 문제도 없고 사회생활도 비교적 원만한 사람이 스스로 불만을 느껴 정신의학적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얼마나 절실하게 치료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에 따라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환자가 필요를 느끼더라도 치료 목적이 불유쾌한 현실을 회피하거나, 비록 내키지는 않지만 단안을 내려야 하는 힘든 결정을 늦추려는 의도를 가졌을 경우, 또는 치료의 필요성이 가족들을 자극해서 난처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인할 때는 치료를 권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직까지 정신질환에 대한 일반인들의 태도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치료를 권할 때는 치료로 얻을 수 있는 혜택과 치료로 받을 수 있는 가정과 사회생활에서의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 p.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