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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우와 링과

[ 양장 ] 위픽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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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14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206g | 100*180*15mm
ISBN13 9791171717064
ISBN10 1171717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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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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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다. 그런 날들이 두껍게 쌓여서 내 조그만 기대를 잘게 부수었다. 방학이 이미 망한 것 같았고, 그 기분은, 무언가를 처음부터 망친 듯한 기분은 아주 익숙하게 호흡을 조여왔다. 울지는 않으려고 몸을 숙여 얼굴을 책상에 대고 살살 비볐다. 나와 박스밖에 없는 방에서 나는 치졸하게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콤플렉스투성이. 방학만 망친 것도 아니면서 뭘 처울어. 울 일도 아닌데. 나는 가끔 내가 실망으로만 이루어진 사람 같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 pp.14~15

이런 틈에 해외여행 중인 룸메이트와 박스 더미 같은 걸 자꾸 떠올리면 발자국마다 우울이 남을 것이다. 경제적 우울, 소비자적 우울, 뭐 그런 것들이 내 몸에서 촛농처럼 죽죽 떨어져 내릴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나를 반쯤 잃어버린 것도 같았다.
--- p.17

“앞으로 뭘 하고 싶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를 둘러싼 사물, 분위기, 정보와 지식, 사람들, 대화,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날이 많지 않았다. 온 세상에 윤곽선이 하나도 없고, 그저 덩어리로 보였다. 그래, 사람들에겐 생각이 있는데 내겐 항상 기분만 있는 것 같았다.
--- pp.36~37

문득, 사람들이 물 한 잔을 마시는 데도 돈이 드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아득해졌다. 다들 처음부터 돈이 있고, 경제의 원리를 알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혼란스럽지는 않은지, 좋아하는 게 있는지, 누가 물어보면 바로 말할 수 있는 인생 계획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나는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나를 알 수 없었다. 가끔은 내가 사실 연속적인 실망과 불안으로 빚은 인간 모양의 케이크라서, 아무 때나 조금만 건드리면 녹아버리고 으깨지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pp.43~44

그러나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한 것만으로 천벌을 받은 것처럼 눈물이 먼저 흘렀다. 아마도 내가 바란 것은 함께하자, 함께 있으면 서로 도움이 될 거야 같은 말, 그런 사소한 환대였던 모양이다. 그것을 너무 바란 나머지, 또 너무 부정한 나머지 왈칵 울 수밖에 없었다. 이네스는 내가 우는 것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아파? 왜 울어? 나는 계속 고개를 흔들다가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한 뒤 화장실에 들어가 훌쩍거리며 온몸을 씻었다. 입안에서 뜨거운 숨이 잔뜩 얽혀 두 번째 혀가 생기는 것 같았다.
--- p.46

이네스는 내가 단어의 뜻을 설명할 때 아주 신중하고, 눈이 반짝인다고 했다. 그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쌓여 있던 안개가 한 움큼 사라졌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 무안해서 어쩔 줄 모르기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 애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좀 더 강렬한 빛을 내 마음에 비추어주려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언어를 좋아하는 것 같아. 많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게 꼭 칭찬은 아닌데도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맙다고 말했다. 이네스는 마치 박스를 끄르듯 나를 해체해서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놓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 pp.84~85

“언젠가 가보고 싶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 올린 이네스가 샤워실 문을 열고 나오자 수증기가 방 안으로 폭발하듯 퍼졌다. 이네스는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는지 뭐라고 했어? 하듯 나를 쳐다봤다.
“네 고향에 가보고 싶어.”
“좋아. 놀러 와. 내가 그리울걸?”
이네스는 방 안에 우리 둘만 있는데도 내가 자기를 그리워할 것이라는 말은 아주 작게 말했다.
“꼭 널 만나러 갈게.”
--- p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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