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영 jylee721@yes24.com
'우스운, 익살스러운' 이란 뜻의 영어 단어 'comic'. 이 단어 뒤에 '~s'를 붙이면 'comics', 즉 '만화'가 탄생한다. 이름의 탄생 과정을 보아하니 성장 과정은 어떠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제 아무리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서도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코웃음 뿐. '엄마, 날 왜 웃기는 녀석으로 낳았나요' 이렇게라도 묻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comics 이 녀석은 꽤나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 왔을 게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이름 지어진 그 순간부터 세상의 숱한 오해와 편견, 놀림을 감내해야만 했던 만화. 과연 '웃음 유발'만이 만화의 유일한 존재 이유일까?
만화는 그저 일회용 볼거리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 만화의 진정한 가치를 설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그 인식이 많이 좋아진 편이긴 하나, 수많은 재능 있는 만화가들의 고군분투가 없었다면 아직도 편견의 벽은 높기만 했을 터. 그런 의미에서 여기, 그 벽을 허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인공을 소개하겠다. 그의 이름은 스콧 맥클루드. 'Zot!' 시리즈를 그린 만화가이자『만화의 이해』의 저자로서 '만화계에서 가장 똑똑한 친구'라 불리는 사람.
『만화의 이해』는 만화를 사랑하는 모든 독자와 비평가로부터 '최고의 만화 이론서'라는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만화 언어의 구조', '만화의 칸과 칸 사이에서 일어나는 연상작용', '만화의 시간과 공간' 등 예술 형식으로서의 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그야말로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 특히 만화 형식을 빌어 만화를 설명하는 이 책의 구조란 그야말로 '만화'다워서 '만화를 위한, 만화에 의한' 같은 수식어가 있다는 사실이(비록 상투적인 것일 지언정) 고맙게 느껴질 정도이다.
'만화는 예술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데에는 왜곡된 정의(앞에서 말한 '웃기는 것'과 같은 식의 정의)가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협소하고 왜곡된 정의로 인해 만화의 역사는 실제보다 훨씬 짧게 책정되었고, 따라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 순수미술 등의 분야에 비해 열등한 분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는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이집트 회화, 18세기의 연작 그림 등에서 만화적 요소들을 발견하고 만화를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한다.
스콧은 만화 어휘(글, 그림, 그 밖의 모든 상징들이 만화 어휘에 속한다)에 대해서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면서 왜 우리가 원 하나와 점 두 개, 선 하나만으로도 - 예를 들어 ('_') 이런 표현만으로도 - 사람의 얼굴을 연상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동시에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던 만화적 요소를 하나 끄집어 내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연상작용. 그림, 글 등의 시각상징어가 만화의 어휘라면 독자의 연상작용, 상상력은 만화의 문법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다.
이때 독자의 상상력은 어느 지점에서 작용하는가.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만화의 칸과 칸 사이의 빈 공간이다. 이 틈새야말로 독자와 만화가 공범을 꾸미는 비밀스럽고도 매력적인 공간으로서 만화의 진짜 재미는 이 빈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메꾸며 이야기의 흐름을 유연하게 하는 독자 자신의 상상력에 있다는 것이다. '만화 이론서'라지만 이쯤 되면 만화 이론서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이밖에도 만화 그림의 선, 만화만의 독특한 시간 틀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이 모든 이야기 속에 공통적으로 녹아 있는 스콧의 메시지는 '만화도 엄연한 예술 장르'라는 점. 더 나아가 다른 예술 장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매력의 산물이기도. 이 당연한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그는 굉장히 많은 예시와 그림, 상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세상의 고정관념은 엄청났다.
그러나 세상의 믿음과는 달리, 오늘날의 만화는 계속 진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다른 매체의 언어가 만화 언어를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나의 통신 용어로 굳어진 (ㅠ_ㅠ) (^-^;) 와 같은 표현들이 어떤 매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이제 만화 어휘는 익히면 좋은 것이 아니라 익혀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회용 볼거리' 내지는 '웃기는 녀석'으로 만화를 비하하는 친구가 주위에 있다면, 매우 설득력 있는 논조로 만화의 가치를 조목조목 따져주는 이 책, 『만화의 이해』를 선물할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