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변화를 모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책은 특히 두 가지에 주목한다. 그건 바로 ‘인류학’과 ‘과학소설(SF)’이다. 타자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인류학과 과학적 사실 혹은 가설을 배경으로 한 SF는 생각 외로 공통점이 많다. 두 분야 모두 우리가 당연시하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안적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 p.9~10
현대 인류학 연구 중 다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국민국가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비평과 더불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돕는다. 비록 사용하는 언어와 피부색은 다를지언정 인류는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종이다. 같은 종으로서 공통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문화적·역사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방증이다. 이런 문화적 다양성에 관한 연구, 즉 인간 집단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고찰을 통해 인류학은 우리가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실천적 지식을 제공한다. 결국 SF와 인류학은 미래를 향한 상상이라는 공통적인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SF가 미래에 관한 픽션이라면, 인류학은 미래를 위한 논픽션이다.
--- p.12~13
『솔라리스』가 보여주듯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상태에서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를 향한 선물은 적절한 유대 형성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애초에 무엇을 선물로 여길 수 있는지에 대해 사전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채로는 주는 이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 선물이다. 선물교환의 바탕이 되는 호혜성, 즉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었을 때 상대가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리라는 논리는 결국 타자를 자신의 거울로 삼아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낯선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첫걸음인 셈이다.
--- p.36~37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장애는 단순히 ‘정상’의 범주 바깥으로 배치되는 것을 넘어, ‘정상인’의 세계에 마치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은폐되기 일쑤이다.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만연한 비장애중심주의를 넘어 실제 현실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신체를 지녔는지 그 스펙트럼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선행되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성년식 순례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통과의례처럼 고통받는 타자의 현실에 눈을 뜨게 만드는 최소한의 사회적 의례인지도 모른다. 기존의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의례가 아니라, 의례에 내재한 전복적 에너지를 현실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게끔 균열을 일으키는 그런 사회적 의례 말이다.
--- p.58~59
타문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고, 자문화를 향한 성찰을 통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우리 자신에 대한 통찰을 얻는 작업은 인류학 연구의 핵심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블러드차일드」는 인류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작품 속 사건이 다루는 모든 묘사가 바로 인간의 출산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출산의 주체를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바꾼 채 말이다. 작가는 아이를 낳는 주체를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꾼 뒤, 출산에 해당하는 은유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임신·출산을 신비화하는 문화적 인식과 선입견을 비틀어 드러낸다.
--- p.66~67
인류학적 논의들이 현실에서 당연시되어온 사실을 새롭게 고찰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낯설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면, 낯설게 보기의 또 다른 통로인 SF는 상상을 이야기로 구현함으로써 세상을 낯설게 보도록 한다.
--- p.74
그러나 시녀들의 존재는 자체로 위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상당히 다양한 방식과 규모로 발현되고 있다. 구시대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는 현재에는 더욱 그렇다. 이 기억들을 토대 삼아 시녀들이 더욱 다채로운 위반들을 꿈꾸고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 p.115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어떨까?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정해진 미래를 개인의 선택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미래에 아무리 나쁜 일이 예정되어 있어도 그걸 바꿀 순 없고, 자신은 그저 그 미래를 알게 되는 게 전부임을 뜻한다. 그렇기에 결코 축복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미래를 아는 능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p.119
인간에게 가능한 건 주어진 현재를 최대한 충실히 살아가고, 그렇게 켜켜이 쌓여가는 현재의 순간들이 모여 자신과 사회 전체를 더 나은 쪽으로 만들어가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것이 원인과 결과가 자연스레 이어지는 인과론적 세계관을 가진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점도 있다. 지금의 어떤 행위가 미래에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현재의 노력을 통해 다가오는 파국과 비극을 피하게끔 노력할 수 있다. 인간이 주어진 미래를 실연해나가는 존재가 아닌 이상, 미래를 모르기에 미지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노력은 인간이 지닌 유리한 조건이기도 하다.
--- p.135
『어둠의 왼손』은 소설 자체의 서사적 재미보다는 독특한 설정이 빚어내는 성찰적 고찰이 강점을 발휘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의 갈등과 고난을 그려내는 서술뿐만 아니라, 외계에서 온 일종의 인류학자 역할도 수행하는 겐리 아이가 기록한 각종 보고서가 이야기 중간마다 삽입되는 형식을 취해 게센 사회에 관한 이해를 돕는다. 관찰자 시점에서 작성된 보고서나 겐리 아이가 수집한 구술 기록과 신화, 전설 등 마치 인류학 연구의 결과물처럼 보이는 부분은 소설을 구성하는 전체 20개의 장 가운데 총 7개의 장에 달한다. 이렇듯 『어둠의 왼손』은 설정과 형식 모두에서 상당히 인류학적인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 p.145
여타 사회과학과 달리 인류학은 연구자의 주관적 입장과 위치를 드러내는 글쓰기가 상대적으로 용인되는 편이다. 그 바탕에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와 인류학적 지식 생산의 객관성이라는 문제를 성찰해온 인류학계 내부의 자기비판적 흐름이 놓여 있다. 1970년대 중후반 이후 인류학 내부에서는 20세기 전반 식민주의 시기에 서구 백인 인류학자가 비서구 유색인 집단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 식민-피식민 관계가 놓여 있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하지 않는 ‘객관적인’ 연구가 가능한지 자문해왔다. 이를 비롯한 여러 자기 성찰의 결과, 1990년대 이후 인류학 민족지에서는 다른 학문 분야에서라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 p.166~167
흔히 인류학은 비서구 지역의 이른바 ‘원시 부족’을 연구하는 학문, 혹은 낯선 타문화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현대의 인류학자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이 서구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신생 국가를 수립하고 각각의 맥락에서 현대화를 추진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이들 지역이 겪은 정치적·사회문화적 변화에 직면하여 인류학도 전통적인 연구 대상이었던 소규모 원시 부족 연구를 넘어 비서구 지역은 물론 서구 지역에 관한 연구로 관심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고, 각국의 현실적인 사회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 p.201
무수히 많은 익명의 개인들이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나서는 이 이야기가 뻔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최소화하며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고, 여러 정체성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가른 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작금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의 기적 같은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식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동안” 보통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는 감동을 주는 동시에, 국가의 역할과 의무에 관한 질문을 끌어낸다.
--- p.214
나는 과거로 돌아가 익힌 전략들을 생각한다. 노예를 사고팔며 채찍질을 일삼던 시기처럼 노골적인 방식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는 흑인 여성으로서 여전히 견고한 차별의 굴레를 체화한 채로 살고 있다. 차별에 대한 감각은 앨리스로부터 나를 잇는 선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직선상으로서가 아니라, 지난한 역사를 겪으며 부단히 변화해온 굴곡진 선으로 존재한다. 차별의 구조 속에서 흑인 여성이라는 타자의 위치를 점한 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나와 비슷한 다른 타자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앨리스와 동시대인으로서 맺은 관계, 그리고 그 시대의 유산을 이어받은 후손으로서 그녀와 맺은 관계는 바로 그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 p.244~245
인류학의 연구 성과는 단순히 독특하고 이국적인 사례 소개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지금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 p.261
르 귄 자신이 다른 에세이에서 직접 강조한 것처럼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기만 해서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차별과 불평등을 양산하는 성장주의 일변의 이데올로기만이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대한 믿음 아래, 진보를 전제하며 미래형으로만 제시된 유토피아 운동 역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대신 르 귄은 자신의 소설이 펼쳐 보인 것처럼 “애매하고 의심스럽고 신뢰가 가지 않으며 최대한 모호한 방식”의 유토피아를 제안한다. 설령 그것이 유토피아답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 p.262~263
2020년대의 인류는 자연을 마르지 않는 자원의 공급처로 여기며 살아온 기존 삶의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손상된 지구에 적합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 역시 지금의 우리에게는 낯선, 괴물이자 유령의 몫이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유령’으로 드리운 과거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괴물’로서의 현재에 등을 돌리지 않는 그런 삶의 태도다.
--- p.290
어쩌면 이 책에서 제기한 논점들이 보기에 따라서는 진부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이야기가 담은 메시지가 그저 ‘착하기만 한’, 당위적 주장 아니냐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 역시 글의 의도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적 상상의 출발점은 그런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를 옭아매고, 불평등의 경계로 우리를 나누고,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환경을 파괴하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넘어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삶도 가능하다는 상상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 상상을 위한 원천을 인류학과 SF에서 찾고자 했다. 설령 그것이 진부하게 보이더라도, 세상은 더 많은 ‘착한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 p.293~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