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들이 〈킹제임스성경〉을 버리기 시작한 1800년대 후반, 미국의 교회들과 신학교들은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공산주의, 현대주의, 상대주의 등의 영향으로 파멸되어 가고 있었다. 바른 성경을 거부하는 배교자들이 기독교 대학들과 신학교들의 강단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이들 교육 기관들을 중심으로 배교의 물결이 퍼져 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D.L. 무디(1837-1899), 샘 존스(1847-1906), 빌리 선데이(1862-1935)가 배교자들과 맞서 싸우는 동안 그들을 이어 싸워 줄 설교자들을 준비시키셨는데, W.B. 라일리(1861-1947), 모르드캐 햄(1877-1961), M.R. 디한(1891-1965), 찰스 풀러(1887-1968), 밥 존스 시니어(1883-1968), J. 프랭크 노리스(1877-1952)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1500-1900년)에 태어나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시대”(1900년부터 교회의 휴거까지)에 배교의 진전과 확산을 직접 확인하며 활동했던 사역자들로서, 그중 한 명이 “프랭크 노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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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미국 메사추세츠주 노스햄턴에서 약 23년간의 목회 기간(1727- 1750) 중 2번의 부흥을 경험했다. 첫 번째 부흥 체험은 그가 목회하던 노스햄턴 교회를 중심으로, 코네티컷 강변에 있는 마을들에서 일어난(1734-1735) 코네티컷 골짜기의 부흥이었다. 에드워즈의 두 번째 부흥 체험은 흔히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 불리는 것으로, 규모 면에서 코네티컷 골짜기의 부흥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왜냐하면 제1차 대각성 운동은 식민지 13개 주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뉴잉글랜드 전 지역에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제1차 대각성 운동”(1735-1755)의 중심인물은 영국인 조지 휫필드였다. 휫필드는 1735년에 회심한 이후 약 34년간을 영국 전역과 웨일즈는 물론, 미국(7번)과 스코틀랜드(14번)를 방문하며 18,000여 회의 설교를 통해 영국과 미국에 부흥의 불을 지폈다.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은 조지 휫필드의 7차례에 걸친 미국 방문 중에서 두 번째 기간(1739. 10. 30. - 1741. 1. 16.)에 일어났다. 휫필드는 1740년 가을에 뉴잉글랜드(미국 동북부 6개 지역의 통칭) 지방을 73일 동안 800마일을 여행하면서 130회에 걸쳐 설교했다. 1740년 10월 7일부터 4일간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스햄턴에 머물면서 설교를 하는 동안 노스햄턴은 다시금 옛날과 같은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 휫필드는 1741년 1월 16일, 미국 2차 방문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휫필드의 사역으로 불붙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부흥은 1741년 4월 여러 지역의 다른 목회자들을 통해 20여 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그해 여름에는 그 범위가 더욱 확장되었다.
이 기간 중 조나단 에드워즈도 여러 지역에서 순회설교를 했는데, 특히 1741년 7월 8일 엔필드에서 행한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진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설교로 많은 죄인들이 회심하고 구원을 받게 되어 부흥은 최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이로써 에드워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주류로 떠올랐다. 그의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진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대각성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오직 〈킹제임스성경〉을 믿음으로써 전파한 이 설교로 인해 많은 죄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 에드워즈의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피하여 영생을 얻으려는 데 관심을 가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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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피니와 관련해서는 유명한 일화들이 많다. 알려진 것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피니가 뉴욕의 방직 공장을 견학할 때 그곳에서 일하던 한 여성이 피니가 다가가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쓰러져 바로 그 자리에서 눈물로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회심은 여인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고 같은 방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일어났다. 그러자 공장주가 “공장 일보다 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면서 그날로 공장 문을 닫고 피니를 초청하여 공장에서 부흥 집회를 열었는데, 모든 직공들을 집회에 참석하도록 하여 며칠 새에 모든 직공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피니가 뉴욕주에 위치한 소돔(Sodom)이란 마을에서 집회를 시작하고 1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앉은 자리에서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피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양손에 칼을 쥐고 휘둘러도 그들을 그렇게 빨리 넘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넘어지기 시작하여 2분도 채 못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저앉거나 엎드려 기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피니가 유티카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그 지방의 장로회 노회도 모였는데, 당시 피니의 사역을 못마땅하게 여긴 한 원로 목사는 피니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격렬한 비난의 연설을 했다고 한다. 집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 문제를 놓고 울면서 기도했는데, 다음날 아침 그 노목사는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고 한다. 앤 월프란 곳에 갔을 때는, 그곳의 교회가 운영이 어려워 술집 경영인의 손에 넘어가 있었는데,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안 피니가 매일 이른 아침에 숲속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피니는 설교했고, 설교를 들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결국 교회당을 되찾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한다.
--- p.37~38
마이어는 1869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이듬해에 리버풀에 있는 펨브룩침례교회에서 “찰스 비렐”(Charles M. Birrell) 목사를 돕는 사역자가 되었다. 마이어는 비렐의 설교 습관까지도 모방하려 할 정도로 그를 따랐다. 그런 마이어가 설교를 한 어느 날 저녁 예배 후, 비렐은 그가 평생 간직할 만한 교훈 하나를 마음속에 새겨 주었다. “오늘 저녁 설교는 꽤 좋았네. 그런데 ‘주제 설교’이더군. 자네가 계속해서 주제 설교만 해 나가다 보면, 얼마 안 가서 주제가 고갈되는 현실에 직면할 것이네. 나는 자네가 지난 30년 동안 내가 해 왔던 방식으로 설교했으면 하네. ‘성경 강해자’가 되란 말일세. 그렇게 하면 언제든지 신선한 설교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강건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걸세.” 다른 양식의 설교보다 “강해 설교”를 위주로 하라는 조언은 설교의 백전노장이었던 이송오 목사도 설교학을 수강하던 학생들에게 자주 하던 조언이었다. 마이어가 이 조언을 수용하여 “마르지 않는 샘물”로부터 계속해서 메시지를 길어 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수많은 설교들과 책들을 통해 증명되고도 남을 것이다.
마이어의 설교를 바꿔 놓은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그의 평생의 친구이기도 했던 D.L. 무디였다. 언젠가 성령으로 충만한 무디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던 마이어는 행정상 어려운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디가 그의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마이어는 당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허공을 치고 있었다!” 무디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 설교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설교했던 무디는 마이어에게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겨와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훗날 그는 무디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회심자가 없는 설교’를 해 본 적이 없다네.”
--- p.5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