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흰 푸들 한마리를 한 손으로 꼭 끌어안은 채 고요히 그네를 타는 할머니. 할머니도 강아지도 특별히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별다른 표정 없이, 그러나 공허해 보이지는 않는 얼굴로, 그러니까 모든 게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그네를 타고 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규칙적인 리듬으로.
지해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게 좋았다.
--- p.36
모든 서사는 성장 서사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성장.
지해는 그 단어에 왠지 모를 저항감을 느꼈다.
--- p.38
모두가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치고, 눈빛을 나누지만 각자의 외줄 위를 걷고 있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줄 수가 없다.
나는 네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 줄 알아. 삐끗해서 떨어져버릴 것만 같은, 떨어져서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아 무서운 마음을 알아. 한편으로 저 아래는 너무 깊고 어두워서 바닥이란 게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몸에 힘을 풀어버리면 다 평온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도.
--- p.124
뭔가가 선명하게 만져진다는 것.
자신의 손을 거쳐 몸을 가진 무엇이 만들어진다는 게 서서히 기뻤다. 하면 할수록 조금씩 더 잘하고 싶어졌다. 그건 조금씩 자신을 갉아먹는 종류의 열망이 아니었다. 그저 매일 반복하면서, 미세하게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소중했다.
--- p.162
바람이 불자 버드나무들이 한꺼번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치 우아한 군무를 보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구나. 자람은 깨달았다.
내 흉터는 저 버드나무를 닮았구나.
직선도 곡선도 아닌 것.
단단하지만 유연한 것.
흔들리지만, 끊어지지 않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해삼과 멍게가 건강하게 살다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거라고, 자람은 생각했다.
--- pp.196~197
지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낮은 숨소리만 새근새근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지해가 말했다.
……살아주면 안 될까. 내 소원이야.
나래는 힘을 내서 응, 하고 대답했다. 두달 만에 처음으로 낸 소리였다.
--- p.204
언니. 나는 가끔 어떤 순간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면, 어떤 열망에 사로잡힐 때면, 모르는 얼굴들이 떠올라. 왜 나는 여기 있고, 누구는 없지? 그런 게 이상해. 나는 왜 살아 있지? 세상이 미쳐 날뛰는 것 같다가도, 근데 왜 이렇게 아름답지? 그런 생각이 들고. 웃다가도 갑자기 죄책감이 들고, 슬퍼할 만한 걸 슬퍼하다가도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단 생각을 해.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싶다가도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런 생각으로 바뀌고. 내가 너무 먼지 같다가도 또 가끔은 우주만큼, 너무 커다랗게 느껴지는 거야. 그러다 아, 그 사람도 우주였는데. 그리고 또 누가 그 사람을 우주만큼 사랑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거야.
--- pp.210~211
나래는 거실로 나가 커튼을 걷고, 도시의 밤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소란하던 세상이 어둠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래는 문득 불이 꺼져 있지 않은 창문들을 헤아려보았다. 왜 누구는 지금 깨어 있고, 누구는 잠들어 있을까.
미래야. 나는 네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언니, 하고 부르던 목소리. 읊조리듯 조곤조곤 이야기하곤 했던 그 목소리를 아직 잊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요함 속에서 나래는 발톱 끝의 욱신거림이 아주 조그만 심장박동처럼 느껴진다는 걸 알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밤들을 이렇게 깨어 있게 될까. 그러나 그 밤들이 아주 고통스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나래는 알았다.
--- pp.216~217
지해는 금목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실제로는 어떤 향기가 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부러 찾아볼 생각도 없었다. 지해의 머릿속에는 지해가 상상한 금목서가 있고, 그걸로 충분하니까. 손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마늘이나 생강 냄새, 꽃 향기가 한데 섞여 오묘한 냄새가 날 때가 있었는데,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지해는 가끔 자신의 손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내려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손은 순간 아주 낯선 것이 되었다가, 곧장 새삼스러운 실감과 함께 되돌아왔다.
식판에서 음식 찌꺼기를 씻어내는 손.
향기로운 핸드크림을 바른 손.
마늘을 다듬는 손.
서가를 더듬는 손.
키보드 위에서 머뭇거리는 손.
모든 손이 자신의 손이었다.
지해는 심호흡을 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한 문장만 나아가자,고 생각한다.
--- pp.225~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