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맞다. 그 뭐냐…… 후장사실주의자라면서요?
어느 순간 장 원장이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장 원장은 여기 오기 전 인터넷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봤다고 답했다. 얼마나 개성 있는 소설을 쓰면 후장사실주의자라는 별명이 붙었냐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스스로 붙였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웃음으로 때울 수밖에. 《문장웹진》에 올라가 있는 〈펜팔〉을 읽었다면서 반시대적이지만 그 반시대성이 오히려 시대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펜팔〉을 읽고 왜 후장사실주의잔지 알았다니까요. 어떻게 이명박하고 펜팔하는 소설을. 기발한 걸 넘어 불순해 보이기도 하고요. 학부모님들이 작가님 소설을 읽어봤으면 기겁을 하셨을걸요. 그럼 진작 공부방도 망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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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는 것이 진짜 전생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게 아쉬워요.” 정민이 대답했다.
“마흔여섯 평생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예요.” 민형이 말했다.
“제가 무너진 건물 잔해를 보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건물인지도 혹시 보셨나요?” 정민이 물었다.
“잔해뿐이었기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방송국이나 체육관, 백화점처럼 커다란 종류의 상업 건물이었을 거예요. 당신 주변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있었고, 카메라도 많았어요. 잔해 밑에도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민형이 말했다.
--- p.58
아마 어떤 젤리는 다른 젤리와 뒤섞여 오랜 시간을 박스 안에서 기다릴 것이다. 또 어떤 젤리는 꺼지지 않는 편의점의 환한 불빛 속에 있을 것이다. 어떤 젤리는 마트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자신을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눌러보기도 하는 어린아이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어떤 젤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나눠주려는 기대에 찬 손에 쥐이기도 한다. 어떤 젤리는 한 노인을 만나 돌보며 함께 살아가고, 어떤 젤리는 여행을 다니고, 어떤 젤리는 열기에 녹아 형체를 잃고 다른 젤리들과 엉겨 붙는다. 어떤 젤리는 정체를 들키고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한다. 어떤 젤리는 유통기한이 지나서 봉지째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어떤 젤리는 방 어딘가에서 영원히 잊히고, 어떤 젤리는 다른 젤리들에게 계속 말을 걸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다. 어떤 젤리는 그 사람을 찾아가고, 어떤 젤리는 자신의 삶을 살고, 어떤 젤리는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 p.124
“예전에는 단 게 좋다고 했잖아.”
나는 한때 자주 단것을 먹자고 했던 선영과 연주를 떠올렸다. 을지로에 숨겨진 작은 카페나 빵집에 가서 혀가 무감각해질 정도로 단 과자나 아이스크림, 커피를 마시기도 했었다. 단맛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밥을 먹은 후 디저트를 먹기 위해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게 즐거울 때도 있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히히덕거렸지만, 사실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래, 혹은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도 여겼다.
--- p.148
나는 어땠을까. 루니와 나는 침묵하는 시간이 길었다.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넘치는 열정으로 국경을 넘을 때만 우리는 잠시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니 그것도 모르겠다. 호르몬의 일이 타인에게 아름다울지는.
나는 십 년 전 조카, 그러니까 이부 언니의 딸에게서 애인을 빼앗았다. 하지만, 사람이든 사랑이든 뺏는다는 게 실제로 가능한가? 그러므로 나는 그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없었다. 무엇보다 죄책감이란 죄를 짓고 난 이후, 여유가 생긴 어느 미래에 비로소 생기는 건데 내게는 그런 시간이 오지 않았으므로 불가능했다. 언니와 나는 나이 차가 컸고, 조카와는 자매 같았다. 나는 그때 그런 짓을 벌이면서도 이 모든 일의 근원에는 어머니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이런 가정을 만들라고 했나. 누가 셋을 자매처럼 자기 근거리에 가둬놓으래. 누가, 누가. 다 이건 어머니가 원인이다, 라고.
--- p.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