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는 주로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주제, 곧 십자가의 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추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실재는 십자가에 대한 해석을 앞선다. 인간의 논리는 인과관계, 필연성, 교환, 은유, 이해 가능성, 유비, 추론에 주로 의존하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의 실재는 인간의 논리 너머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비한 자기희생을 인간의 논리 체계 속에 가두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것이다(막 15:30).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옷을 동일시할 수 없고(막 15:24), 그리스도 좌우에 있던 행악자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수 없다(눅 23:40). 십자가의 실재와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 사이에 존재하는 피할 수 없는 괴리로 인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있다. 우리의 모든 주장과 관계된 근원으로서의 “십자가 그 자체”는 무엇인가? (프롤로그 중에서)
“십자가 그 자체”는 세속주의와 기독교 제국주의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한다. 한국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학적인 경향과 무관하게 “승리합시다!”라는 인사를 나눈다. 이런 인사는 세속적인 가치를 극복할 수 있는 영적?종교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종종 성공, 명예, 권력의 쟁취를 포함하는 세속적 가치 지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교회는 자주 세속 가치를 추구하는 도박장, 또는 타문화와 타민족을 말살하는 호전적 전투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본질적으로 “획득과 죽임”(gaining and killing)이 아니라 “상실과 죽임 당함”(losing and being killed)이다. 십자가 이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치게 빨리 전환될 때, 희생과 섬김이라는 기독교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기독교 세속주의와 제국주의를 초래하는 천박함은 십자가를 “결과 중심적 틀” 속에서 이해할 때 생긴다.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coram cruce)조차 예수님의 옷에 더 관심이 많다(요 19:23). “그 자체로서의 십자가”는 우리 관심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시 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생명이 오로지 죽음 다음에 오기 때문이고(요 12:24), 죽음 없이는 생명이 결코 죽음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신-인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고 있고, 그 더 많은 것은 자신의 충만함으로부터 온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은 모두를 위해서 일회적으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 일상의 삶을 위해서 “지금 하고 있는 것”으로 흘러넘친다.108 그뿐 아니라 이 흘러넘치는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데, 그분은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로서 이 보상을 작동시키고 따라서 우리는 신-인 안에서 이 은혜와 보상을 즐겁고 자발적으로 공유한다. 우리 일상 속에서 이루어나가야만 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진보 그 자체가 십자가로부터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보상이다. 비록 안셀무스의 통전적인 십자가론이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안셀무스의 십자가론에서 본질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사이에 균열은 없다. (2장 중에서)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그분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 한 분만이 드러내시는 기술이자 지혜다.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이런 지혜가 성령의 일을 통해서 믿음 안에서, 믿음과 함께 주어진 십자가에 대한 지식이라는 점이다. 이 지식 없이는 우리는 생명, 죄 용서, 마귀를 이긴 승리를 볼 수 없다. 이것은 마귀가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십자가의 실재는 하나님의 실재, 우리의 참 모습,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실재를 드러낸다. “어떻게, 언제, 그리스도의 어떤 본성이 승리를 일으키는가?”라는 질문은 순전히 우리 인간의 사색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시간적인 순서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경향,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가운데 각각의 역할을 분담시키려는 경향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서 공격하려고 하는 바로 그 인간성의 표현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