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가며 절로 알 수 있었던 것은 흰 종이 위로 먹이 지나간 후에 남는 여백이었다. 한 글자 속에 있는 공간들, 글씨와 글씨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선, 글씨를 둘러싼 예민한 둘레, 붓이 지나간 뒤의 여운, 붓이 만든 종이 위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 p.13
먹은 물이 있어 가능하고 붓은 먹이 있어 가능하다. 먹은 또한 벼루가 있어 가능하고 먹과 붓은 종이가 있어 가능하다. 이토록 떨어질 수 없는 벗도 드물다.
--- p.15
서예는 종이 위의 길을 알아가는 공부다.
--- p.16
먹을 갈 때 생기는 묵향은 노동의 향이요, 그로 인한 묵상의 향이다. 그 은은한 향기가 외로운 ‘서예길’을 걷게 하는 그리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 p.20
먹이 글씨가 되어 남는다. 먹이 뜻이 되어 남는다. 먹이 ‘그 사람’이 되어 남는다. 그리하여 먹을 함부로 종이에 남길 수 없다.
--- p.21
한지는 먹을 마다않고 온전히 받아들인다. 먹을 한지보다 더 드러나지 않게 흠뻑 받아들이는 종이는 없을 것이다. 개미가 제 몸의 몇 곱절 되는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것처럼, 한지는 가볍고 얇은 제 몸으로 놀라울 만큼 많은 양의 먹을 한껏 품는다. 함부로 먹을 번지게도 하지 아니하고, 헤프게 퍼뜨리지도 않는다. 지나친 번짐으로 붓의 길을 잃게도 하지 아니하고 야속하게 먹을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냥 지긋이 머금는다. 그렇게 붓이 거짓으로, 가식으로, 과장으로 가는 길을 막아준다.
--- p.25
‘글씨’라는 말은 참 아름답고 신비하다. 글속에 ‘씨’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말씨’는 말속에 씨가 들어 있다는 뜻이요, ‘마음씨’는 마음속에 씨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씨는 근본이며, 뿌리가 되는 알맹이고, 열매로 가는 처음이다. ‘마음속 씨’와 ‘말속 씨’가 만나서 피어나는 열매가 글씨다. 그리하여 글씨는 씨도 되고 열매도 된다.
--- p.36
서예는 먹의 아름다운 빛깔로 붓의 유연성을 빌어 시간과 동행하는 유머다. 그 끝에서 헐렁함과 무구함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걷는 걸음과 태도는 꼿꼿하고 정갈해야 한다. 서예는 까다로운 유머다.
--- p.46
자연은 저마다 고유한 숨으로 산다. 사람도 누구나 다른 숨을 쉬며 산다. 그 조화와 어울림으로 지구는 숨을 쉰다. 자연이 부르는 노래와, 자연이 사는 몸짓을 따를 문장은 없다. 하여, 자연스럽고 무심한 문장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 p.52
서예로 걸어야 할 길은 다만, 글씨에 내 정신을 어떻게 담느냐, 무엇을 담느냐에 있다.
--- p.54
어느 날, 종이에 쓴 글씨가 슬프게 보일 때가 있다. 먹이 획이 글자가 종이가 슬프게 보인다. 문자와 종이에 담긴 시간들을 읽어서다. 그 시간 속에서 유한한 인간의 역사가 비춰져서다. 글 쓰는 이가 서예를 통해 연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움튼 연민이 문향과 문기와 문정을 만든다.
--- p.57
서예가 낯선 것은 우선, 학교나 주위에서 잘 배우지 못해서다. 한글서예에 대한 무관심도 있겠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특한 문명인 한글에 얼굴을 돌린 채 살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학교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는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은 흐릿해지듯, 가장 가깝고 귀중한 우리문자 한글에 소홀한 것이다.
--- p.59
그리스어가 어원인 ‘캘리calli(아름다운) 그래피graphy(쓰는 것)’는 글자 그대로 ‘아름답게 글씨를 쓰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두루 쓰이는 캘리그래피는 글씨를 예쁘게 보이려는 것에 집중하여 겉치장이나 외모에 신경을 쓴다. [...] 캘리그래피와 서예는 그 가는 길도 다르거니와 그 결도 사뭇 다르다. 캘리그래피가 아름다운 글자를 쓰는 것이라면, 서예는 아름다운 정신을 쓰는 것이다. 글씨의 ‘겉’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씨의 ‘속’을 쓰는 것이 서예다.
--- p.76
어느 해인가 우연히 조선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 복도에서 만난 붓글씨. ‘조선은 하나다’ ‘우리는 하나다’ 울컥했던 순간이다. 가슴이 일렁이고 묵직한 감동이 온 몸에 퍼졌다. “아, 여기에 있었구나. 바로 이곳 조선학교에선 우리 한글서예가 살아 있었어.” 학생들이 쓴 글씨와 마주한 것은 우리 역사와 마주한 것이고, 한반도 현실과 마주한 것이며, 재일조선인들의 세월과 또한, 우리 한민족의 미래와 마주한 것이었다.
--- p.84
세종이 백성에게 가르치려고(훈민) 했던 글자는 ‘정음’이었다. 정음은 글자 그대로 ‘옳은 소리’다. 백성들이 하는 말을 문자로 만들었으니 이 땅에 일상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말로 생각하고, 우리말로 말하고, 우리글로 쓰게 된 것이다.
--- p.89
세종이 지독한 한자권력에서 모든 사람을 언어로 해방시킨 ‘혁명의 언어’를 만들었다면, 주시경은 실제로 한국인이 쓰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일상의 언어’를 선물했다. 그가 지키려고 애썼던 한글도 세종시대 못지않은 개혁이었다. 그는 정음이라는 씨앗을 터뜨렸다. 그리고 고이 길러 한글로 피워냈다. 잠자던 ‘정음’을 ‘한글’로 부활시켰다.
--- p.91
‘모어’는 ‘모국어’와 그 개념이 다르다. 말은 엄마에게 배운다. [...] 모어는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눈을 마주친 엄마에게 듣고 배운 말이다. 모어는 자궁으로부터 배우는 언어다. 모어는 한 인간의 언어씨앗이다.
--- p.92
무엇보다 한글서예를 말하는 이유는, 거듭 강조하지만 서예는 내 생각을 쓰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 p.96
한글을 연민의 문자라고 했는데, 그런 면에서 한글은 평등의 언어요, 낮은 자들을 위한 언어다. 바로 그 중심에 여성들이 있다. 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역설적이면서도 위대한 역사다. 양반 남성들에게 한글이 애물단지였다면, 여성들에게 한글은 자식 같은 존재였다. ‘암클’이라고까지 하며 한글을 낮춰 부른 시대상황을 눈여겨본다면, 남성들에게 한글은 내놓은 자식이었고, 그 불쌍한 존재를 여성들이 품고 아껴 키운 것이다.
--- p.107
궁체는 아침세수를 한 듯 산뜻하고, 저고리 선처럼 가지런한 글씨다. 자상하고 민감하며 꿋꿋하고 섬세하다. 궁체는 그 글꼴이 정숙하면서도 강직하여 고요하면서도 은근한 울림이 있다. 한편, 조심스러운 궁 안 생활이 있어 긴장감이 없지 않지만, 특유의 여성성과 모성애가 닿아 모음과 자음을 어루만지듯 자상한 글꼴을 유지한다. 한결같으나 리듬감이 살아 있다. 고아하면서도 통속적인 글꼴로 부담이 없다. 그 글씨는 흐트러짐이 없고 총명하며 세심하면서도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과연 한글글씨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 p.108
이른바, 민체는 자연스러운 파격이 풍성한 동산이다. 올라갈 수도 없는 높고 뾰족한 곳이 아닌, 나지막한 데다 바로 뒤에 있어 전혀 부담이 없는 마을동산처럼 민체가 보여주는 글씨는 살갑고 정답다. 그러나 파격이라고 할 만큼 저마다 글씨가 제멋대로여서 속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사람마다 쓰는 말이 다르듯, 집집마다 웃음소리가 다르듯, 민체에는 저마다 고유한 생김새가 있다. 글씨가 서툴지만 문맹을 벗어나고픈 비장함이 없다. 오히려 과하지 않은 유머가 비친다.
--- p.112~113
씨앗을 뿌리던 손이 쓴 글씨요, 빨래하던 손이 쓴 글씨요, 설거지하던 손이 쓴 글씨요, 나무하던 손이 쓴 글씨요, 밭을 갈던 손이 쓴 글씨다. 민체는 글씨 그대로 우리 삶이요, 우리 숨이다. 그리하여 우리 글씨다.
--- p.113
우리 눈앞에 역사청산, 분단, 통일, 평화라는 숙제가 놓여 있다. 이렇게 쌓인 문제들을 뒤로하고 서예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산수와 격언에 갇혀 있다는 것은 고루함을 넘어 신랄하게 말한다면 죄다.
--- p.119
농현의 유연성도 연주자의 손에 달려 있다. 그 감정에 실린 떨림으로 다른 음악이 된다. 연주자마다 정서와 톤과 음색이 다른 이유다. 때론 작은 파문처럼, 때론 거센 파도처럼, 때론 호수처럼, 때론 시냇물처럼 곡을 연주하는 농현弄絃이 곧, 글씨를 만드는 먹과 붓의 어울림이다.
--- p.124
이 세상 모든 글씨가 선생이고 스승이다. 다른 만큼 스승이고 다른 만큼 선생이다.
--- p.127
글씨를 쓴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다름’을 공부하는 일이다.
---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