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샘의 근원과 같은 설교가의 설교문과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적 친교를 나누게 되고, 생활의 구체적인 영역에 필요한 영적 지도를 받게 된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는 영적 지혜를 얻는다.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지혜는 고전이 주는 묘미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된다. 현장 독서를 하며 가는 곳마다 나는 내면의 음성을 들었다. ‘눈에 담아 두라! 귀에 담아 두라! 입에 담아 두라! 마음에 담아 두라!’ 그러나 그 감동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오래된 고전을 오늘에 새롭게 들려주고 싶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다만 무심하여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낙스의 인생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용기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왕의 절대 권력과 부패에 맞서 싸우면서 여왕도, 교황도, 국민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턴(Morton) 백작은 낙스의 묘 앞에서 “여기 일평생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누워 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 「존 낙스」 중에서
백스터는 “목회자도 천국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목회자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설교해야 한다. “정확하게 설교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 것보다 설교한 대로 정확하게 사는 것 이 더 중요하다.”
--- 「리처드 백스터」 중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는 누가복음 16장 9절에 기초해 “돈의 사용”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신실한 청지기로 사는 방법을 3단계(GSG)로 제시한다. 첫째, 할 수 있는 대로 벌어라(Gain all you can). 둘째, 할 수 있는 대로 절약하라(Save all you can). 셋째, 할 수 있는 대로 나눠 주라(Give all you can). 다 중요하지만 방점은 세 번째에 있다.
--- 「존 웨슬리」 중에서
시어 중에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맞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어린이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예수님과 워즈워스 모두 ‘어린이’라는 말로 동심만이 아니라 완악하지 않은 부드러운 마음,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마음, 순전한 믿음, 가난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 「윌리엄 워즈워스」 중에서
뮬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 했다. 기도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했다. 하나님을 기뻐했다. 그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렸다. 더 좋은 것을 기대했다.
--- 「조지 뮬러」 중에서
만약 세이어즈의 주장대로 작가들이 창조주의 존재 방식대로 글을 쓴다면 왜 명작과 졸작이 나오는 것인가? 그 이유는 완벽한 작가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에 비유한다면, 하나님은 완벽한 아버지이시다. 세상에는 완벽한 아버지는 없다. 하나님을 작가에 비유한다면, 하나님은 완벽한 예술가이시다. 세상에는 완벽한 예술가는 없다. 그래서 아이디어가 빈약한 작품, 화려한 어구만 있지 알맹이가 없는 작품, 어떤 감동도 없는 작품이 있다.
--- 「도로시 세이어즈」 중에서
참된 신앙이 희귀해지고, 비전이 없고, 말씀이 희박해지고, 하나님의 등불이 사라질 위기에 처할 때 성령의 능력이 강권적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죽음의 상태를 분별하고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사무엘은 미스바 대성회를 인도해 이스라엘 민족의 부흥을 이끌었다. ‘부흥’(復興)은 영어로 ‘revival’, ‘되살리다’는 의미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시 85:6). 부흥의 결과는 회복과 고침이다.
---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중에서
체스터턴은 다양한 사조와 철학을 섭렵했기 때문에 그들의 장단점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적어도 모든 좋은 철학의 문에 들어가 보았다.” 따라서 체스터턴은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 회의주의, 버나드 쇼, H. G. 웰즈, 버트런드 러셀, 니체, 토머스 헉슬리,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레프 톨스토이, 오스카 와일드, 허버트 스펜서, 카를 마르크스에 대해 정밀하면서도 명쾌한 비판을 가할 수 있었다.
---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중에서
신자가 죄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할 때 구원받은 자의 지위와 신분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답게 새 생명의 활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게 되고, 그의 영혼과 심령은 파멸에 이르러서 불신자들과 다름없게 되어 버린다. 비참한 신자가 되는 것이다. 로마서7장은 성령의 법에 따라 죄의 법과 싸우는 신자의 심령 상태를 묘사한다.
--- 「존 오웬」 중에서
“어떻게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떤 기쁨을 회복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우면 반대로 생각해 보자. “현재 우리는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가?” 현재의 슬픔을 알면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기쁨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것인지도 알 수 있다.
--- 「존 웨슬리」 중에서
스펄전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댐’(recumbenc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무엇인가에 기대고, 휴식을 취하고, 뒤로 편안하게 눕는 행위를 의미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대는 것이며, 주님 안에 서 쉼을 얻고, 그분의 품 안에서 편히 눕는 것을 의미한다.
--- 「찰스 스펄전」 중에서
루이스의 이런 상태는 『고백록』에서 “주여 내가 당신을 마음에 모시기까지는 내 마음에 만족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한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팡세』에서 “하나님이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인간들에게 만드셨다”라고 말한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을 연상시킨다.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은 ‘God-Shaped Vacuum’인데 이는 하나님 자리, 하나님 흔적이다.
--- 「C. S. 루이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