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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기록

[ 반양장 ]
리뷰 총점10.0 리뷰 3건 | 판매지수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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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01일
판형 반양장?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140*215*30mm
ISBN13 9791197883965
ISBN10 1197883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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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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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흰 무명에 푸른 쪽물을 들이던 순간을 기억한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색도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올과 올 사이를 밀물처럼 파고들던 색의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올과 색소의 결합은 느리지만 강렬한 소용돌이처럼 짜릿했다. 항아리 속을 떠돌던 색은 흰 천을 만나 비로소 온전한 자신의 자리를 얻은 듯했다. 밭에서 늙으신 할머니는 잡초나 다름없어 보이는 쪽을 못마땅해 하셨다. 나는 콩 대신 색을 수확했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무명을 마당에 널었다. 쪽에서 풀려난 색이 하늘로 이어졌다. 너풀거리는 천을 매만지며 할머니가 그러셨다. 참, 곱다. 내 두 손도 푸른 물이 들었다.
--- p.13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을 어딘가에서 탕, 탕, 나무방망이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는 흘려듣던 소리도 양포를 어떻게 만드는지 이해가 되자 달리 들렸다. 절구질 소리보다는 경쾌했고 다듬이질 소리라기에는 느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조금씩 소리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골목길 끝에서 두 번째 집 맨 아래 어두운 창고였다.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자가 너른 돌판 위에 푸른 천을 올려놓고 힘차게 나무방망이로 두드리고 있다. 천을 뚫기라도 하려는 듯 방망이를 돌 위로 내리친다. 여자의 가는 허리가 휜다. 천에서 색이 스며나와 돌마저 푸른 물이 들었다. 색이 여자의 방망이에 으깨져 빛으로 변해갔다. 웨량산 밤하늘의 달빛이 이슬처럼 천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 p.46~47

낯선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 나타난다. 그건 그동안의 여행길에서 얻은 나만의 믿음이기도 했다. 갈등이 찾아오면 일단 저질러야 뼈아픈 후회가 없는 법. 길이 막혀 화가 난 운전사가 마지못해 차 문을 열어준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것과 동시에 의심과 갈등은 언제 그랬냐 싶게 호기심과 환희로 변해간다. 거리가,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인생은 때론 찰나다. 지나간 버스가 돌아오지 않듯 매 순간도 그렇다. 잘 가시오, 운전사 양반!
--- p.53~55

축제는 광기의 다른 말이 아닐까. 어느 한 곳을 향해 무섭도록 집중하는 힘은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온몸이 떨렸다. 느닷없이 오줌보가 뜨겁게 부풀었다. 몸살 같은 흥분을 잊고 산 지 오래였던 것이다. 스스로가 황홀에 빠져 춤추고 노래하는 자들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자는 처음부터 달랐던 모양이다. 열정과 흥분과 광기를 잃은 삶은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나는 두근거렸고, 좀 참담했다.
--- p.57

색색의 실로 놓은 자수와 희고 정교한 무늬들. 조금 전 소녀가 그리던 무늬가 그녀들의 옷 위에 그대로다. 푸른색보다 흰색이 더 많다. 화포가 푸른 바탕에 흰 무늬라는 통념은 이곳에선 고정관념에 속한다. 이들의 화포에서 무늬는 희지 않고 푸른색이다. 흰 바탕에 푸른 점들이 꽃 같다. 여자들의 몸짓에 따라 푸른 꽃들이 춤을 춘다.
--- p.67

상점 안에서 두 손을 토시에 넣은 노인들이 나온다. 파랗고 빨갛고 노란 토시에도 꽃무늬가 찍혔다. 희고 푸른 꽃들은 이제 저렇게 자리를 옮기거나 서서히 잊혀가는 중이다. 누런 벽돌을 성벽처럼 쌓아 올린 늙은 고성의 골목은 이제 거기가 거기 같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막다른 골목이 나타나곤 한다. 나는 고성 안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 p.74

푸른색이고 화포고 다 집어치우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한 감정이 목젖까지 차오른다. 여행이 위험해진다. 그때 리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비와 어둠과 텅 빈 광장에서 여행에 빨간불이 켜졌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버스표와 잠자리를 해결해주었다. 혹시 누군가가 미리 짠 극본이 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또 나는 서로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 하는 즐거운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와 함께 고성 골목을 오가는 전기자동차를 탄다. 비가 내리는 스산한 저녁이 아니어도 오늘은 훠궈를 먹어야겠다.
--- p.79

푸른색만이 아니라 훨씬 다양해진 색들 위로 짧은 직선과 곡선으로 그려진 호박꽃과 씨앗과 기하무늬가 박혀 있었고, 아예 ‘인디고Indigo’란 간판을 내건 상점이 성업 중이었다. 푸른 방 같았다. 온통 블루로 가득한 상점 안을 돌아보며 이들에게 화포란 무엇일까 묻고 싶었다. 몽족의 그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무늬로 장식된 옷가지며 생활용품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때론 화포를 까맣게 잊기도 했다. 색도 다양한 산속 여인들의 붉디붉은 무늬를 빌려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푸른색과 화포를 찾는 선명한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일까 의심스러웠다. 상점 한쪽에 무심하게 놓인 푸른 화포, 그녀들의 것이 분명했지만 이제는 그녀들만의 것도 아니었다. 화포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 p.99~101

화포는 보였지만 정작 화포를 만든 그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먼 산속에서 물이 흘러내려 도시에 이르듯 화포는 사방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지만 정작 그들의 모습은 오리무중이었다. 온 곳도 간 곳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슨 게릴라들처럼 나타났다가는 바람처럼 사라졌고 그 자리에 푸른 화포가 놓여있었다. 그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차라리 이제는 사라져버린 화포라면 그만 잊을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거리 어디에선가 고개를 내밀어 내 호기심에 불을 놓았다. 어쩌면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똘똘 뭉쳐 있던,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를 불러내려는 심사인지도 몰랐다.
--- p.102~103

어쩌면 원형 그대로의 화포를 찾고자 하는 내 욕심으로 화포 이외의 것에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자신은 온몸으로 문명의 편리를 누리며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는 꼴이었다. 당신들은 언제나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으라고, 그래야만 한다며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는 몰염치와 다르지 않았다. 여행은 때로 누군가에게 모독일 수 있었다.
--- p.115

길은 언제나 마을로 이어졌고 또 언제나처럼 음악이 울렸다. 그런데 오늘은 좀 요란하다. 느낌이 온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는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과 도로 사이의 잔디밭은 이미 흥이 넘친다. 푸른 차양 아래 사방으로 식탁이 길게 놓이고 술과 음식 접시가 탁자를 가득 메웠다. 음식을 보자 참았던 허기가 꿈틀댄다. 노래에 맞춰 춤판이 한창이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였다. 사람들만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죄다 몰려와 한몫 잡으려고 걸음이 바쁘다. 아이들도 그렇고 개들도 그렇고 닭들도 그렇다. 나도 저 틈에 끼어야만 한다.
--- p.127~128

마치 색색의 꽃물결 같은 박하의 시장에서 꽃 중의 으뜸은 단연 옷 시장이다. 설 대목의 의류점은 그저 황홀하다. 어디에서 이런 색의 폭풍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물들이는 푸른색은 명함도 내밀기 부끄럽다. 색은 온통 푸르거나 붉다. 그래서 그녀들을 옷의 색으로 구분하는데, ‘블루 몽족Blue H'mong’과 ‘플라워 몽족Flower H'mong’으로 부른다고 했다. 물론 그게 몽족의 전부는 아니다. 중국에서 라오스로 건너온 소수민족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서서히 분화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런 구분이 우선은 여인들의 옷 색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박하 시장에 오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장신구 구역도 따로 있다. 그러니 이 환상의 골목은 당연히 여인들의 차지다. 남자들의 옷은 이곳에선 뒷전이다. 그저 눈치를 보고 뒤를 쭈뼛거리며 따라다니는 처지다. 색만으로도 시장 구경은 신이 나는데 이곳에도 내가 아는 그녀들의 옷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저 나름 ‘핫’한 요즘 옷이다. 하나가 사라지거나 변하여 또 다른 것이 생겨난다.
--- p.170~171

마치 색색의 꽃물결 같은 박하의 시장에서 꽃 중의 으뜸은 단연 옷 시장이다. 설 대목의 의류점은 그저 황홀하다. 어디에서 이런 색의 폭풍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물들이는 푸른색은 명함도 내밀기 부끄럽다. 색은 온통 푸르거나 붉다. 그래서 그녀들을 옷의 색으로 구분하는데, ‘블루 몽족Blue H'mong’과 ‘플라워 몽족Flower H'mong’으로 부른다고 했다. 물론 그게 몽족의 전부는 아니다. 중국에서 라오스로 건너온 소수민족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서서히 분화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런 구분이 우선은 여인들의 옷 색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박하 시장에 오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장신구 구역도 따로 있다. 그러니 이 환상의 골목은 당연히 여인들의 차지다. 남자들의 옷은 이곳에선 뒷전이다. 그저 눈치를 보고 뒤를 쭈뼛거리며 따라다니는 처지다. 색만으로도 시장 구경은 신이 나는데 이곳에도 내가 아는 그녀들의 옷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저 나름 ‘핫’한 요즘 옷이다. 하나가 사라지거나 변하여 또 다른 것이 생겨난다.
--- p.190

화포는 늘 이들의 일상 가까이 있었다. 쪽으로 물을 들이던 시절이나 쉽고 간편한 합성염료로 바뀐 뒤에도 생활 속에 넘쳐나던 것이 저 화포였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 조선의 사정은 어땠을까. 조선 후기에 그렸다는 기록화가 떠오른다.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흰옷 일색이던 조선의 거리가 말이다. 푸른 화포로 지은 옷을 입을 수 있었던 박지원은 특별한 경우였을 것이다. 그 역시 권력과 돈과 지위가 있는 소수의 양반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머지 조선 사람들은 푸른색이나 화포에 대한 호기심도 욕구도 없었단 말인가. 그래서 누구나 흰옷만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던 것일까.
--- p.207

개인 주택을 화포관으로 만든 듯했다. 눈이 가는 곳마다 화포다. 도대체 누구일까. 남들은 사라져가는 퇴물을 애써 붙들려는 이런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고민을 지니고 다닌다. 무엇이 나를 여기로 이끄는 것일까. 그렇다고 사라지는 과거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함부로,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들이 안타까웠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일방적인 폐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쓸쓸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문득 화포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35~237

나 역시 어색한 대화를 어떻게 이어갈지 마음이 어수선했던 참이다. 왜 그도 같은 일을 하는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것일까. 어쩌자고 나의 일방적인 생각만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일까.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다시 방문해도 되느냐고 내가 물었고 시모무라 씨는 꼭 통역을 할 사람과 같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고 나는 내 안일함에 미안했다. 그가 버스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악수를 나눴다.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속담처럼 전해져오는 말이 있었다. 쪽 염색을 하는 사람은 결코 나쁜 일을 할 수 없다는. 손에 물든 푸른색 때문에 누구인지 금방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시모무라 씨의 굵고 뭉툭한 손마디에도 푸른 물이 들어 있었다.
--- p.258~259

붉은 기운이 묻어나는 밝은 갈색의 주택과 하얀 회벽이 만들어내는 소박한 무채색의 골목을 걷다가, 어느 집 처마 아래 혹은 좁은 대문 위에 걸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색색의 노렌을 만나는 순간의 감흥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무슨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는 들뜬 환희라기보다는 저렇듯 평범하게 각각의 미감을 지켜나가는 일상의 풍경에 대한 긍정의 기쁨인 경우가 더 많았다. 작아도 좋았고 커도 좋았다. 꼭 쪽으로 푸르게 물들인 시보리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나는 노렌의 평범한 미감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p.261

석양이 낮게 깔리는 강물 위로 청둥오리 몇 마리가 물속으로 머리를 처박는다. 강변의 허리가 꺾인 대나무가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린다. 다리에 걸터앉자 신발이 물에 닿을 듯 가깝다. 구이저우의 두류강에서 이곳 요시나가와까지 나를 내몰던 것은 무엇일까. 나도 상하이의 그녀처럼 푸른색과 화포에 매혹된 것이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녀와 나의 매혹이 단지 색과 무늬에만 있었다면 두 사람 모두 그 먼 길을 가지 않았을 성싶다. 눈앞에 보이는 것 말고도 보이지 않는 무엇이 더 있을 것도 같다.
--- p.289

아와오도리가 넘치는 흥과 춤의 파티라면 그와는 정반대로 고독과 함께 걷는 순례의 길인 오헨로お遍路가 있었다. 시코쿠의 해안을 따라 총 88개의 절을 이정표 삼아 걷는 도보여행인 오헨로는 섬의 숨겨진 보물과도 같았다. 수백 년 전 스님들의 구도의 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 도시가 아와오도리의 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면 순례는 계절을 따지지 않고 차분한 일상 안에서 일 년 내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 첫 출발지가 지난 시절 드넓은 아와의 쪽밭을 앞에 둔 료젠지靈山寺였다. 로젠지를 출발해 해안가를 따라 남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길을 꺾어 북쪽 해안을 지나 오쿠보지大窪寺에 이르는 대장정이 바로 순례의 길이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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