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어리석은 자들아,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러한 고난을 당하고서 그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하시며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에 관하여 모든 성경에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설명하시더라.(눅 24:25-27).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형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위의 말씀에서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모형”과 관련된 성경 읽기법을 가르치셨음이 틀림없다. 특히 모세오경과 관련해서는 모형들로 설명하실 수밖에 없으셨는데, 왜냐하면 “여자의 씨”(창 3:15)나 “실로”(창 49:10), “목자, 곧 이스라엘의 돌”(창 49:24),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5,18)와 같은 직접적인 예언들을 제외하고는 모세오경에서 주님에 관해 설명할 부분은 아담과 이브의 관계나 요셉의 인생, 성막의 제사 제도 등에서 보이는 “모형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에 관하여 모든 성경에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설명하신 것은 “근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한 것이었다(눅 24:18). 그 사건들은 구약성경에 이미 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들과 시편에 “주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주님께서 보여 주시기 전까지는(눅 24:44,45) 그 익숙했던 구약 구절들을 깨달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원형의 그림자에 불과한 “모형들”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제시된 모형들을 무시하면 모세의 율법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는가를 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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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가 보여 주는 은혜로 받는 구원
방주를 통해 노아 가족이 구원받은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구원받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둘 모두 “은혜로”,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제공된 구원 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엡 2:8,9). 노아는 방주의 재료, 규격, 디자인 등에 있어 그 어떤 것이라도 스스로 정하지 않았다(창 6:14-16). 우리 또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계획을 수용했던 것이다. 방주의 재료는 나무였는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나무가 성경에서 사람을 빗대어 표현할 때 등장하곤 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만하다(판 9:7-20, 대하 25:18,19, 막 8:24). 즉 나무로 만든 방주는 먼 미래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심판을 피할 방도를 마련하시기 위해 “인성”을 가진 이(히 2:14,15)를 보내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구원 계획을 마련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계획으로친히 초청까지 하셨다. 그분께서는 늘 전혀 아쉬울 게 없으시면서도 우리 사람들을 불러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신다(사 55:1). 노아가 방주를 완성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방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그분께서는 그 방주 안에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그 방주는 안전했다. 그 어떤 재해라고 해도 감히 하나님을 가라앉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마 8:23-27).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신 일도 정확히 이와 같다.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시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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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멜키세덱이라는 제사장이 존재했다는 진리를 묵상해 본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는 없다. 아론, 레위, 심지어는 그 어떤 유대인의 출생보다도 앞서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명하게도 그 제사장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며, 유대인의 조상인 히브리인(창 14:13)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그리고 다 아는 바대로 축복이란 낮은 자가 더 나은 자로부터 받는다(히 7: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시며(롬 3:29), 심지어 이방인들의 제사장이 레위 계열의 제사장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멜키세덱이 이방인이라는 진리는 그가 사용했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이방 민족들의 모든 신 위에 있는 신으로서 높여드릴 때 사용했던 표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단 3:26; 4:17; 5:18; 7:25, 행 16:17). 또한 “십일조”를 받았다는 점 역시 그가 이방인이었음을 더더욱 상기시키는데, 10이라는 숫자는 이방인의 수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이방 왕국은 창세기 10:10에서 언급되고, 이방인 코넬료가 구원받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이다. 대환란 때에는 다니엘 2:42에서 형상의 열 발가락으로 언급되는 10개의 이방 왕국들의 연합체가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경은 멜키세덱이 이방인이었음을 보여 주는 장치들을 이토록 많이 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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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생애에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가 네 번 있었다.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매우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했다. 먼저 칼데아 우르를 떠나며 고향과 친족을 내놓아야 했다. 다음으로 조카 롯과 결별해야 했다. 아브라함에게 롯은 약속의 땅에 함께 온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내쫓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약속된 씨” 독자 이삭을 바쳐야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씨를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약속된 씨에 대한 믿음이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시험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시험을 받을 때 진정한 시험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도 주님을 위해 내려놓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데, 결코 쉽지 않은 그 일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반응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보고자 하셨던 것은, 첫째,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드릴 믿음이 있는가?”이고, 둘째, “드린 이삭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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