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화가의 인생이 담긴 그림들과 지그시 눈을 맞췄다. 그가 짊어졌을 삶의 무게에 가슴이 내려앉고 그가 바라봤을 어느 고적한 농가에 몸이 이끌렸다. 검붉은 저녁노을을 등지고 선 황량한 벌판의 오두막집 두 채, 이파리를 다 떨어뜨린 앙상한 자작나무, 얼굴에 두 손을 파묻은 남루한 노인과 다 낡아빠진 신발 한 켤레, 식탁 앞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여인들이 전시장 벽을 타고 내게 다가왔다. 푸르스름하고 누르스름한 파리의 풍경도,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과 노란 집도, 그리고 까마귀가 우는 밀밭도 반 고흐가 감당해 온 세월이었다.
그는 연필과 목탄, 여러 종류의 물감들로 캔버스를 메워 갔다. 다양한 붓놀림을 연구하고 렘브란트의 에칭 기법에 골몰했다. 온종일 이젤 앞에 앉아 가는 붓으로 일일이 점을 찍어 나무 이파리를 만들고, 입체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수십만 번의 붓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에 이젤을 펴고 축축해진 캔버스 위에 모래를 덧입혀 질감을 살리기도 했다. 돈이 궁할 때면 포장지 뒷면에도 그렸고 이미 사용한 캔버스를 재활용하기도 했다. 완성된 결과물이 싫으면 켜켜이 흠을 내 그 위에 똑같은 대상을 다시 그렸다. 실험과 시행착오는 이어졌다. 새로운 장소로 옮길 때마다 새 화법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방황을 하고 방랑을 했다. 결과물들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농촌에서 거리로, 회색에서 노란색으로, 구름에서 태양으로, 앙상함에서 풍부함으로 변해 갔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 p.52-54
나는 카퓌신 대로 35번지 건물 앞에서 21세기로 돌아왔다. 1층에는 스위스 브랜드 발리 매장이 진을 치고 있다. 드가의 환영을 따라 이곳까지 왔지만 흑백사진으로 보던 운치 있는 건물은 겹겹의 세월을 안고 너무 말끔하게 변했다. 그래도 정면을 메운 통 유리창만큼은 그대로다. 풍자만화가이자 사진가였던 나다르가 패기 넘치는 화가들에게 스튜디오를 빌려 주면서 어느덧 미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기게 된 건물. 이제 그 주변은 또 다른 파리의 들썩임으로 메워지고 있다.
옆에서는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쇼핑백을 든 관광객들이 두리번거리고, 커피를 든 회사원들이 총총걸음을 하고 있다. 햇빛을 받은 유리창은 윤기가 나고 매장 입구는 드나드는 손님들로 분주하다. 지붕 없는 관광버스 2층에서는 한 떼의 승객들이 신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노인은 큰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나는 2013년 여름날의 파리 거리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이 모든 장면들은 지금 내가 나의 기분대로 내 시각대로 바라보는, 하나의 ‘인상’일 것이다. 풍경 자체가 아니라 풍경이 낳은 감각을 느끼고 묘사하는…. 그러나 1870년대에는 이 당연한 감성을 지키기 위해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야 했던 화가들이 있다. 모네가 말했듯이 그냥 ‘인상’일 뿐인데.
“풍경은 인상 그 자체에 불과하다.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것이다. 전시 도록에 들어갈 그림의 제목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즉흥적으로 그려 낸 르아브르의 풍경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인상〉이라고 하게나!(로버트 고든, 『모네』 중에서)” 그리고 모네가 불쑥 던진 이 한마디로 인해 1874년 5월 이후 이들은 ‘인상파 화가’라 불렸다. 물론 이 용어가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 p.143-144
“고여 있는 물의 잔잔함을 응시하다 보면 긴장된 신경들이 풀어질 겁니다. 이 방은 꽃이 만발한 수족관 한가운데에서의 평온한 사색을 선사할 것이라오.” 전쟁 후 피폐해진 파리지앵들에게 평화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싶었던 모네는 그의 말대로 오랑주리를 찾아올 관람객들에게 거창한 감상평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저 편히 쉬었다 가라고. 잠시 현실의 짐을 내려놓고 꿈을 꾸듯 명상에 잠겨 보라고.
눈을 감기 직전까지는 이 그림들이 지베르니의 집, 자신의 품을 떠나지 못하게 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1927년 5월에서야 오랑주리로 영구 안착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수련들. 모네 자신은 정작 전시장에 앉아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하고 떠났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었던 그는 작업하던 내내 이미 묵상의 경지를 수도 없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방에 각자 혹은 함께 앉아 시간을 보낸 후 박물관이 문을 닫을 즈음에서야 일어났다. 중년의 나이를 넘긴 탓일까. 누군가의 초연한 마음을 읽게 되면 자꾸만 눈물이 난다
--- p.213
집 모양으로 된 묘실 외벽에는 모자를 쓴 드가의 얼굴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스케치한 것처럼 간결한 선으로 표현된 그의 해맑은 모습을 보며 쌓였던 노곤함이 풀렸다. 공동묘지에 와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오솔길은 아늑하고 나무들은 풍성한 그늘을 드리웠다. 우리는 드가의 얼굴과 마주하며 돌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그제야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드가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밀렸던 얘기도 하나둘 풀었다.
“만일 불행한 누군가에게 아직 위로해 줄 게 있다면, 그래서 그 아픈 마음을 달래 줄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사람과 사물의 움직임일 걸세. 만일 이파리들이 더 이상 살랑거리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얼마나 슬프겠는가.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겠지. 바람에 흔들리는 이웃집 정원의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네. 저 친구는 나를 참 기분 좋게 해주는구나!(드가, 52세 때 친구인 앙리 루아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6년.)”
솔솔바람이 분다. 영롱한 이파리들이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 주듯 팔락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조금씩 말라 간다. 어디론가 더 나설 계획이 없는 오늘, 나는 좋아하는 이들과 숲길에 앉아 있다. 드가 선생님이 슬그머니 곁눈질을 한다. 이런 말을 건네는 것 같기도 하다. 저 잎사귀가 하느작거릴 때 열심히 바라보게나. 인생이 유쾌해지고 싶다면 말일세.
--- p.258-259
다시 시계 바늘이 한 바퀴 돌아간다. 수면 위로 석양의 마지막 광채가 감돈다. 모네의 그림 〈에트르타의 석양〉 장면이다. 해변의 주인공들도 교체되었다. 미끼통과 긴 작대기를 든 낚시꾼들이 은밀하게 나타났다. 아이들의 외침이 줄어들고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억세졌다. 밤 11시를 넘겼다.
“어쩌면 에트르타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멋진 곳일지도 몰라.” 나는 절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렇게 말했다.
“겨울에는 어떻게 변할까. 비나 눈이 와도 멋있을 거야. 나중에 꼭 다시 오자고. 그땐 좀 더 오래 있어도 좋겠지.”
T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여전히 바다 곁에 있었다. 암전이 된 하늘 아래 새로운 빛들이 등장했다. 해변 산책로에는 노란 가로등이, 절벽 밑에는 황금색 조명이, 교회 탑에는 붉은 등이 켜졌다. 깜깜한 바다에서는 배 한 척이 불을 깜빡이고 있다. 산책자들의 발걸음은 끊어지고 낚시꾼들의 긴 낚싯줄은 더 깊게 드리워졌다. 연인들은 서로에게 더 다가가고 갈매기는 더 구성지게 울어 댔다. 바위들은 더 음산해지고 파도는 더 거세졌다. 그리고 칠흑 같은 하늘에 단 하나의 영롱한 빛이 생겼다. 절벽 위를 밝히는 노란 초승달이었다.
--- p.335-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