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심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1989년, 1995년, 한국문예진흥원 한국문학상 번역 부문에서 각기 장려상과 대상을 수상했으며, 이 밖에도 「코리아 타임스 한국문학번역상」을 세 차례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시집 『아무리 아니라 하여도 혹시나 그리움 아닌가』가 있고 옮긴 책으로 『붉은 왕세자빈』,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메카로 가는 길』, 『위안부』(공역),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 『네토츠카의 사랑』, 『마르셀 푸르스트』 등 다수가 있으며 영역으로 『손님The Guest』(공역), 『「총독의 소리」 외 현대 한국 단편선The Voice of the General and Other Stories of Modern Korea』,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외 박완서 단편선My Very Last Possetion』, 『불놀이Playing with Fire』, 『무기의 그늘The Shadow of Arms』, 『태평천하Peace under Heaven』, 『천둥소리The Sounf of Thunder』, 『회색인A Grey Man』, 『이어도Iyo Island』 등이 있다.
아이오와를 지나갈 때 타는 듯이 뜨겁던 그날, 우리의 대화는 그 옛날 우리 둘이 함께 알고 지냈던 보헤미아 여자아이에 관한 이야기로 자꾸 되돌아갔다. 우리가 기억하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는 그 여자아이가 바로 그 시골이고 그 상황이고 그 시절의 모든 모험을 의미했다. (……) 「이따금 안토니아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 중서부를 지나는 긴 여행에서는 객실에서 그런 걸 쓰면 기분이 좋아.」 읽어 보고 싶다고 했더니 꼭 보여 주겠다고 했다. 언제고 끝나기면 하면. 몇 달 후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오후, 짐이 서류철을 들고 내 집에 나타났다. 거실로 들어와 손을 녹이면서 선 채로 말했다. 「여기 있어. 아직도 읽고 싶어? 어젯밤에 끝냈어. 시간을 들여 정리하면서 쓴 게 아니라 그 이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그냥 그대로 적어 놓은 거야. 일정한 형식도 없을걸. 아직 제목도 없는걸.」 그러고는 옆방으로 가서 내 책상에 앉아 서류철 겉장에 「안토니아」라고 썼다. 순간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름 앞에 한 자를 첨가했다. 「나의 안토니아」. 그러고는 비로소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pp.10~11
쉬메르다 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이제 자유로워진 그의 영혼은 틀림없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시카고까지는 얼마나 멀까, 그리고 버지니아까지, 또 볼티모어까지, 그다음에 저 거대한 겨울 바다까지는 또 얼마나 멀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아니다, 그토록 먼 여행길에 지금 당장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추위에 지치고, 비좁은 집에서 사느라 지치고, 쉬지 않고 끝없이 내리는 눈과 싸우다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영혼은 지금 이 조용한 집 안에서 쉬고 있는 중이라고 나는 믿었다.---pp.103~104
눈을 감으면 덴마크 세탁소에서 일하는 처녀들과 보헤미안 메리 세 명이 모두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레나가 그들 모두를 나에게 다시 데려다 주었다. 전에는 전혀 생각도 못 했으나 이 처녀들과 베르길리우스의 시와의 관계가 문득 떠올랐다. 이들 같은 처녀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라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실은 나에게 지극히 소중한 것이어서 혹시라도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봐 가슴 깊이 간직했다. 마침내 책을 펴고 자리에 앉자 짧은 치마를 입고 추수 밭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레나가 등장하던 나의 그 옛날 꿈이 실제 경험의 추억처럼 느껴졌다. 그 장면은 한 폭의 그림처럼 책장 위에 나타나 아물거렸고 그 밑에는 한 줄의 슬픈 구절이 두드러지게 적혀 있었다. 「가장 행복한 날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pp.258~259
지금도 눈만 감으면 어둠 속에서 덜거덕거리며 달리던 마차 소리가 들리다가 다음 순간 그 소리는 모든 것을 지워 버리는 신기한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고 만다. 그날 밤에 느꼈던 감정들은 너무도 생생해서 손만 뻗으면 어루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비로소 나 자신으로 되돌아온 기분이 들었으며, 한 인간의 경험의 범주가 그 얼마나 작은 원을 그리고 있는지 깨달은 느낌이었다. 안토니아와 나에게 이 길은 운명의 길이었으며 또한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앞날을 미리 결정해 주었던, 어린 시절의 온갖 시간들을 가져다준 길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바로 이 길이 우리를 다시 연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든, 우리는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그 소중한 과거를 함께 소유하고 있었다.---p.350
한 소년이 열 살 때 열네 살 먹은 한 소녀를 마음에 드어 한다. 「마음에 들어 하는」 그 마음은 소년이 중년의 신사가 될 때까지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잔잔하고 애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나의 안토니아』 안에 들어 있다. 읽는 이가 이 작품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까닭은 포원의 황폐함과 숭고함이 이 사랑을 요약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리라.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