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지위가 그가 가진 가장 작은 장점이라고 말했니? 그의 장점들은 모두 다 그의 지위에서 비롯된다는 걸 왜 모르니. 자, 잘 들어봐. 그는 부유하기 때문에 너그럽다고 불리는 거야.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용감하다고 불리는 거고, 시중을 받기 때문에 다정다감하다고 말해지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라고 해. 영국 전체가 그렇게 믿으라고 해. 하지만 우리는 그를 알아. 그는 우리의 적이야. 우리가 끼니를 간신히 때우며 궁핍하게 사는 건 그의 탓이야.”
---1권 40쪽
철학에게 휴전을 선언한다! 진정한 삶이 내 앞에 놓여 있고, 나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돌진한다. 희망이 나를 이끈다. 명예와 사랑, 그리고 누구도 지탄할 수 없는 야망이 나를 안내한다. 내 영혼은 두려움을 모른다. 달콤하게만 느껴졌던 그 모든 것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현재라는 것에 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라는 것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내가 직접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높은 염원으로 가슴이 뛰는 게 두렵지는 않았냐고? 아니, 나의 이글거리는 시선은 구름 낀 밤, 깊은 어둠도 관통할 듯했다.
---1권 66~67쪽
가장 어려 보이는 병사 하나가 우리 군의 조롱하는 태도에 분개하며 소리쳤다.
“너희가 가져라, 기독교의 개들아! 우리의 궁을 가지고, 우리의 정원을 가져라. 우리의 사원을 가져가고 우리 아버지들이 사셨던 집을 가져가라. 물론 역병도 함께 가져가야 할 거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바로 그 역병이 우리의 적이기 때문이다. 역병이 너희의 벗이 된다면, 품에 마음껏 끌어안거라. 알라의 저주가 스탐불에 내렸으니, 너희도 그 운명을 함께 나누라.”
---1권 350~351쪽
“지옥의 땅에서 얻어낸 사악한 씨앗이 존재하는 한, 이 땅이 결코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합니다. 계절이 모두 같아지고, 세상의 공기가 무질서를 낳지 않으며, 이 땅에 더 이상 가뭄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질병이 사라질 겁니다. 인간의 욕망이 모두 죽어버리면, 그때 비로소 굶주림이 우리를 떠나게 될 거란 말입니다. 사랑이 증오와 더 이상 흡사하지 않게 되면 그때에야 비로소 인류애가 존재하게 될 거예요. 현재 우리는 그런 미래와 아주 많이 동떨어져 있어요.”
---1권 401쪽
우리의 간절한 질문에 그는 떨리는 입술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 단어를 뱉어냈다. 역병이오.
“어디에 말입니까?”
“모든 곳에……. 도망쳐야 하오……. 모두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이오? 아무도 답을 줄 수가 없소……. 이 땅에 숨을 곳이란 없소. 그것은 마치 수천 무리의 늑대들처럼 우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오……. 우리는 도망쳐야 하오. 그대들은 어디로 갈 거요?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요?”
---2권 28~29쪽
병실에는 악취가 진동했고, 나는 속이 뒤집혀 견디기가 힘들었다. 시신이 실려나가고, 병자들이 새로 들어왔다. 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무심한 얼굴로 손발을 놀리고 있었다. 어떤 병자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고, 또 어떤 이들은 환각에 사로잡혀 낄낄댔다. 절망스럽게 흐느끼는 사람, 자신을 버린 친구들을 소리 높여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절망과 유기, 그리고 죽음의 화신이 된 듯한 간호사들이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2권 91~92쪽
어떤 불사의 존재나 필사의 존재가 그 서글픈 행렬에 우리가 참석하려는 걸 막아서겠는가? 인류에게 위안을 안겨주던 희망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게 되었는데?
---2권 148쪽
더딘 걸음으로 소리 없이 다가온 역병은, 그들을 예외로 삼지 않았다. 선택받았다는 신자들에게도 역병이 침투했고, 일순간에 그들의 망상을 무너뜨렸다. 교주는 발병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는 부정의 비밀을 공유하는 소수의 추종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의 잔인한 계획이 실행되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역병이 발병하면, 환자를 눈에 띄지 않게 데려나와 한밤중에 노끈으로 질식시킨 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버렸다. 사라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변명을 꾸며댔다.
---2권 303쪽
그 천국 같은 도피처에서 행복하지 않았냐고? 어떤 친절한 영혼이 우리에게 망각을 속삭여주었다면, 그곳에서 행복할 수도 있었으리라. 길도 거의 없이 깎아지른 듯한 산이 우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황량해진 세상은 멀리 떨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조그만 노력을 보탠다면 세상의 도시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울려퍼지고 있다고 충분히 상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농부들은 여전히 쟁기로 밭을 갈고 있고, 우리는 그저 자유롭게 북적대는 세상을 떠나와 여행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인류의 멸종을 떠올리는 대신 말이다.
---2권 346쪽
그렇게 몇 년을, 몇십 년을 살아가야 한다니, 그럴 수 있을까? 이제 겨우 25일을 살았을 뿐인데, 이 삶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과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렵게 바라보곤 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죽음 후의 세상을 알 수 없어서? 하지만 나의 외로운 미래는 죽음보다 더욱 험난하고, 더욱 예상할 수 없었다. 나는 지팡이를 부러뜨리고, 그것을 멀리 던져버렸다. 내 삶의 성장을 한 치도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2권 389쪽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