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목축의 기원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
고고학적 유골
유골의 형태는 동물이 도축된 연령과 동물의 성별에 대해서도 알려주며, 인간이 그 동물을 활용한 방식에 관해서도 많은 정보를 준다. 특히 이S는 이러한 관점에서 좋은 정보원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이는 그 성질(젖니인지 간니인지)과 발육 및 마모의 정도가 나이와 함께 일정한 방식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도축 연령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일부 뼈에 자잘하게 남겨진 날카롭고도 깊은 흠집들은 동물의 몸이 분할되어 그 고기가 소비된 흔적에 해당한다. 이 흔적들의 형태와 위치, 빈도를 연구하면 고기의 소비 방식만이 아니라 당시 인간이 동물의 몸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에 관해서도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동물의 몸을 이해하는 방식이 곧 분할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_22쪽
목축의 출현 장소와 시기
사람들이 종종 말하듯 개의 가축화와 더불어 목축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개를 기른 인류 집단이 소, 돼지, 양, 염소 등을 사육하는 목축 활동으로 바로 옮겨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축을 행한 집단에서도 개를 기른 행위와 다른 동물을 사육한 행위는 수천 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별개로 나타났다. 개는 마지막 빙하기인 막달레니안문화기나 나투프문화기와 그 이후 홀로세 초기인 중석기시대까지 100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수렵인의 반려동물로 존재했으며, 이 시기에 인류는 다른 동물을 기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나 뉴기니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수렵·채집 집단들도 식용을 위한 목축을 하지 않으면서 개를 소유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개의 가축화가 여느 동물들의 가축화와는 다른 성질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 옛날 개의 가축화는 목축이 아니라 사냥 행위 및 수렵인의 생활 방식에 연관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후 동물의 고기와 젖을 얻기 위한 목축이 시작된 뒤에도 개는 사냥과 방어에 관계된 역할을 주된 임무로 유지했다. 실제로 개한테 가축 떼를 모는 임무가 맡겨진 것은 훨씬 더 나중인 역사시대에 접어든 뒤의 일이다._27~28쪽
목축 기술: 고기와 젖의 생산
염소의 도축 프로필을 보면 그 소비가 0~2개월에서 정점을 이룬다. 젖먹이 새끼 염소가 많이 소비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어린 염소들이 많이 잡아먹힌 이유는 무엇일까? 염소의 출생 시 자연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어린 염소의 부드러운 고기를 특히 좋아했기 때문일까? 첫째 설명은 배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의 발육 상태로 볼 때 문제의 염소들은 갓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며칠 내지 몇 주는 지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설명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목축으로 수익을 얻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어린 염소의 대부분을 죽인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제일 그럴 법한 설명은 어미의 젖을 전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새끼를 빨리 없앴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낙농업계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도축 프로필에서 2~4세(이 연령들은 모두 어림값이다) 무렵에 도축 비율이 다시 약간 상승한 것도 나이가 들어 젖 생산량이 줄기 시작한 염소들(‘노폐?
했다’고 일컫는)을 도축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_60쪽
2장 목축은 인류 역사의 혁명인가?
인간은 왜 유제류를 가축으로 만들었을까?
직관적으로 생각해볼 때 동물의 가축화는 고기와 젖을 얻는 데 사냥보다 더 효과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목축은 세계적 차원에서나 예의 나투프문화 마을 차원에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량을 더 많이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가설이 유효한 것이 되려면 적어도 다음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동물의 가축화는 특히 고기 소비와 관련해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목축은 당시 사회가 거의 자발적으로 고안해낸 행위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8500년 무렵 서아시아에서 유제류의 목축이 시작된 이후에도 유프라테스 강 유역이나 다마스쿠스,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리한 PPNB 마을의 주민들은 사냥을 그만두지 않았다. 동물고고학적 자료상에서 영양이나 야생당나귀, 오록스, 들염소의 유골이 여전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놀라운 점은 당시 사람들이 사냥감들에서 얻은 고기의 비중이 가축에서 얻은 비중보다 대개는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일부 지역의 경우 유제류 가축에서 얻은 고기의 양은 아주 소량이었다. 목축을 했다는 것은 특히 오록스처럼 크고 위험한 짐승을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기술적 투자를 했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목축에서 얻은 고기의 양이 많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_84~85쪽
자연을 길들인다는 것
‘자연을 길들인다’라고 표현했을 때 ‘길들이다’라는 단어는 동물의 가축화라는 문제에서 그 단어가 갖는 뜻과 물론 같은 뜻이 아니다. 뒤에 가서 보겠지만 이제 살펴볼 내용에서 ‘길들이다’라는 단어는 환경에 대한 부분적이고 무의식적인 소유를 가리킨다. … 코르시카의 포유류가 1만 년에서 1만 2000년의 시간 만에 불과 여섯 종에서 스물여섯 종으로 늘어났다는 말인데, 이는 1,000년마다 1.7종이 유입된 비율에 해당한다(이 비율은 처음 여섯 종이 멸종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수치다. 사실 스물여섯 종이 유입되는 데는 6,500년도 걸리지 않았으며, 이는 1,000년마다 4종이 유입된 비율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지중해 섬들이 자연 상태에 있었을 때, 다시 말해 인간이 들어와 살지 않았던 플라이스토세에는 새로운 종이 1,000년마다 약 0.06종이 유입되었다. 종의 유입이 평균적으로 1만 년마다 한 번도 안 되는 꼴로, 즉 우연의 작용(예를 들어 동물이 헤엄쳐 건너오거나 나뭇가지를 타고 건너오는 것 같은)으로 발생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석기시대 초 이후로 코르시카에 새로운 종이 유입된 비율은 상대적으로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신석기시대 이전에는 작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요인이 개입되었음을 암시한다. 게다가 해당 현상이 신석기시대 인류가 코르시카에 정착한 바로 그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에 미루어 볼 때, 결국 문제의 개입은 인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코르시카 자체를 인간의 소유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 환경을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방식으로 소유했고, 이는 적어도 포유류에 있어서는(조류와 파충류, 양서류는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섬의 동물상을 완전히 뒤바꿀 정도로 충분히 큰 변화였던 것이다.
---pp.11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