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할 때나 다른 사람의 신심과 그들의 필요를 돌아볼 때, 또한 올해 우리에게 일어난 아름다운 일과 슬픈 일들을 떠올릴 때 감동하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보십니다.
그분은, 귀는 있지만 듣지 못하는 조각된 우상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듣는 권력자와도 다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들으십니다. 당신 자녀들의 투정과 분노까지 들으십니다. 그리고 듣는 것만이 아니라, 듣기를 좋아하기까지 하십니다. 우리 곁에 머무르고, 우리 얘기를 경청하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느끼며 좋아하십니다.
― 18쪽 하느님은 우리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 29쪽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마음을 찢으십시오.’ 왜냐하면 이런 균열을 통해서 참된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찢고’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찢어지고 열린 마음 안으로만 우리를 사랑하고 고쳐 주시는 성부의 자비하신 사랑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36쪽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사랑은 조정자가 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는 가끔 ‘조정자mediator’란 용어를 ‘중개자intermediary’라는 용어와 혼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용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조정자’는 각 부분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자신의 월급, 자신의 것을 지불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개자’는 자기가 받아야 할 정당한 수입의 대가를 양측에서 받는 소매 상인입니다. 사랑은 조정자에게 맡겨진 역할이지, 중개자에게 맡겨진 역할이 아닙니다.
― 42쪽 사랑의 실천 여부가 심판의 기준
자캐오는 스승 예수님이 자신의 집 식탁에 앉으신 것이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일어나 삶을 바꾸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 것처럼 기쁨에 겨워서 하게 된 결정이지, 절대자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삶을 바꾸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의 집에 손님으로 머물렀을 뿐이고, 자캐오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찬례를 통해 하고 계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그저 “네 마음에 머물고 싶구나. 성찬례 안에서 나를 받아 주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 49~50쪽 평화를 위해, 식량을 위해, 일자리를 위해
사순 시기 동안, 회개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조건 없는 은사를 묵상하며 신앙의 뿌리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합시다. 신앙은, 감사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의 행위를 통해 좋은 결실을 내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은사입니다.
― 74쪽 그분은 무상으로 주십니다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은 무척 나약하고 한계가 많음에도, 외적인 영향과 압박으로부터 가볍게, 또 자유롭게 날아오릅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질투와 공포 사이에서 무겁게 끌려다닙니다. 또한 불이익과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결과에 따른 가치를 평가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힘만을 계속해서 강화하려고 합니다.
― 92~93쪽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노인들이 버림받는 이유가 그들이 쓸모없는 물건으로 취급받아서만은 아닙니다. 그들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이기주의가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만 필요하고 그들만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소비주의 모델에 따라 노인들은 참여할 수도, 의견을 말할 수도, 관여할 수도 없는 문명 속에서 오늘날 그들은 생존을 위해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인들이야말로 온 사회를 위해 민족이 지닌 지혜의 담지자가 되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 97~98쪽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힘은 사랑입니다. 타인을 강화시키고, 일을 하게 하며, 어떤 것으로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혹은 죽음 앞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굳이 청춘의 아름다움이나 인정 혹은 허락, 돈이나 특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시작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비방하고 파괴하려고 할 때 점점 더 강해져서 논박할 수 없게 됩니다.
― 100~101쪽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용서하게 하고, 미소 짓게 하며, 우리 삶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까이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한 사람씩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부족한 사람들을 돌보고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한다는 확신(마태 25,40 참조)으로 불안하게 서 있는 그들이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 115~116쪽 믿음의 문턱을 넘어
이 청소년들이 앞으로 우리를 받아들이게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깃발을 넘겨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깃발을 어떻게 넘겨줄까요?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깃발을 반만 게양한 채 이상만 지닌 어른으로 성장할까요? 아니면 조화를 지향하며 깃대 가장 높은 곳에 깃발을 게양하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할까요?’
― 123쪽 조화를 이루는 교육
그리스도인이 과거의 도시를 건설했다면, 이제 그리스도인은 ‘도시 건설을 넘어’ 도시를 바꾸고, 여러 혼합된 문화에 젖은 이들과 더불어 모든 문화와 대화해야 합니다. 모든 문화에는 그리스도교적인 요소가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적인 요소는 다른 문화와의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에 여러 가지가 혼합된 다양한 문화 속에서도 올바른 식별을 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 165쪽 하느님은 도시에 사십니다
‘그리스도인’을 흔히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도시에서 모든 이와 함께 살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바라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세사 안에서 모든 이에게, 있는 그대로, 구체적인 임무를 다해야 합니다.
― 167쪽 하느님은 도시에 사십니다
가난은 우리에게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의 양심을 요구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름과 성이 있고 정신과 얼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배척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사회적 불의에 익숙해 있다는 것은 중대한 도덕적 결핍을 야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키며, 사회의 조화와 평화를 위협합니다.
--- 205쪽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