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용자를 왕처럼 모시진 않겠습니다
왕처럼 모시지 않겠다는 말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용자들의 요구에 무조건 따르지는 않겠다는 뜻과 왕을 섬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정으로 존중하겠다는 뜻. 모순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말 그대로다. 고객을 ‘고이 모셔두지 않고’ 그들의 상상력과 꿈에 말을 걸겠다는 다짐인 동시에, 말을 걸면 기꺼이 소통과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의 표현이다. … 왕처럼 모시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자발성에 대한 바람과 ‘가르치려고 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선언이다. 책을 ‘읽는’ 것은 지극히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행위가 아닌가. 훌륭한 시설과 장서를 갖추고 있다 해도, 책을 만나고 그 만남의 진동이 삶 속에 스며들도록 ‘만들’ 수는 없다. 도서관은 말을 걸 뿐, 상대방의 머리와 가슴에 가닿는 것은 그들 자신의 몫이다._25∼26쪽
어느 날 아이들 몇 명이 와서 자기들끼리 내기를 하는 중이라며 물었다.
“000이 공짜인 거 맞아요?”
“아니죠? 1,000원이죠?”
책마다 붙어 있는 띠라벨을 보고 300은 사회과학이 아니라 300원, 600은 예술이 아니라 600원, 900 역사는 두꺼운 책도 많으니 제일 비싼 900원(!)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한 아이들이 000 총류에서 공짜냐, 1,000원이냐 의견이 갈린 것이다. 그 뒤로 우리는 도서관의 중요한 기능인 배가의 원리를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이해시킬 수 있는 다채로운 이용자교육을 궁리하고 시도했다. 도서관의 책이 어떻게 제자리를 갖는지, 아이들도 쉽게 익힐 수 있도록._51쪽
느티나무도서관에서 오랫동안 고수해온 원칙 중 하나가 “안 돼”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다. 모든 걸 허용하거나 방관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규제가 생기면 그만큼 자유가 몫을 내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책을 펼쳐들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도서관에 머무는 모든 시간 동안 자유롭고 자발적인 긍정의 기운을 누리기 바랐다.
도서관만큼 ‘제재’ ‘통제’ ‘금지’ 같은 낱말이 어울리지 않는 곳도 없을 것이다. 뭔가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곳, 배우고 성장하며 상상하고 꿈꾸도록 북돋우는 곳 아닌가. 도서관은 저마다 배움과 성장의 스토리를 엮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필요한 자료를 만날 수 있도록 담고 있는 저수지 같은 곳이다. 인류의 모든 지적?문화적 활동의 기록물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사유와 성찰을 흔들어 깨우고 상상력을 북돋우어 삶에서 자유의 폭을 넓히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통제하기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기꺼이’ 배려하며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문화, 참으로 당찬 바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서관다운, 도서관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존중이나 배려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운다. 자발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도록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충분히 존중받고 배려받는 기회를 누리도록 도서관의 환경과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_87쪽
어딜 가든 도서관 소개와 이용안내를 담은 홍보물을 가방이나 주머니에 지니고 다녔다. 쉽게 건네줄 수 있는 갈피표 같은 기념품에 도서관 전화번호, 문 여는 시간, 자료대출 규정 같은 것을 간단하게 적어넣어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관련 기관이나 단체, 업체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프로그램을 기획해보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이었다. 업무와 관련된 책을 읽어주거나 소속 기관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볼 수 있고, 그곳을 탐방하는 견학 프로그램을 시도해볼 수도 있었다. 소방서에서 점검을 나왔다가 이야기손님이 되어준 소방대원은 유니폼 덕에 어느 아이돌 스타보다 더 인기를 누렸다. 팬층도 두터웠다. 예닐곱 살 어린아이들에서부터 40∼50대 여성들까지.
소방수나 전기기사, 배달원으로 만나던 이웃 아저씨 아줌마가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삶을 만나고 자신들이 사는 지역사회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_102쪽
02 공간으로 말을 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건물과 책과 사람이 어떻게 함께 나이 들어갈까 생각했다. 한해 두해 시간이 흘러 책이 채워지고 사람들이 찾아와 머물면서 차츰 건물에 표정이 생기기를 바랐다. 그 생각을 도서관 건물에 담은 것이 노출공법이다. 민낯. 건물 전체 외벽에 타일이나 돌 같은 마감재를 붙이지 않고 콘크리트 표면 그대로 드러나게 두기로 했다.
노출공법에 기대한 건 여백이었다. 여백과 빈틈은 달랐다. 이가 빠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채울 수도 있고 다시 비울 수도 있도록 만들려고 했다.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했다. 지역에 깃들인 사람들의 삶의 시간이 쌓이고 흘러가는 곳이 되도록._130쪽
아무래도 도난방지장치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에 못 이겨, 일단 도서관용품업체에 전화를 걸어 ‘가장 싼’ 것으로 설치하면 얼마나 들지 물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봐야 하지만, 최소한 1300만 원쯤은 들 거라고 했다. 입구에 게이트만 세우면 되는 게 아니라 책 한 권마다 감응테이프도 붙여야 하는데 그 장비비와 인건비는 뺀 가격이었다. 그 한마디에 일사천리로 의사결정이 진행되었다.
1300만 원어치 책을 잃어버리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 더 망설일 필요 없이 그냥 ‘책 잘 잃어버리는’ 도서관이 되기로 했다. 사실 느티나무도서관은 사립문고로 운영되던 시절에도 도서관의 모토 가운데 하나가 ‘책 잘 버리는’ 도서관이었다. 공간이 작아 해마다 출판되는 수많은 책 가운데서 일부만을 골라야 하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료의 보존과 이용이라는 도서관의 역할 가운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냐의 문제였다. 느티나무도서관처럼 장서량이 모두 10만 권이 되지 않는 곳에서는 보존보다는 이용이 먼저라고 생각했다._136쪽
우리가 도서관을 지으면서 배운 것은 도서관을 운영할 사람의 역할이 설계 단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좀더 욕심을 내자면, 도서관 건립계획을 세우고 부지를 선정할 때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박물관, 학교, 병원, 식당…, 사실은 서비스가 있는 건물이라면 다 마찬가지겠지만 도서관은 공간구조가 자료의 종류와 양, 서비스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도서관에서 어떤 서비스가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이뤄질지 알 수 없는 건축사가 대체 무슨 수로 설계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아직 한국 도서관계에서는 건축과 인테리어는 물론 가구배치와 집기, 장비까지 모두 세팅된 뒤에 사람이 배치되는 게 현실이다. 도서관 ‘건립’과 ‘운영’이 예산에서 따로 취급되고 담당부서마저 다르기 때문이다. 도서관 문을 열기 전에 직원 정원을 확보하려고 하면 ‘사무실도 없고 책도 없는데 뭐한다고 인력을 벌써 배치하느냐’는 게 의회나 정책결정부서의 반응이라고 한다. 심지어 사무용 PC에 정수기까지 모두 갖춘 뒤 개관식 날에야 관장과 사서에게 열쇠를 넘겨주는 경우도 있다. 행정의 경직성이 빚어내는 비효율의 대표적인 예다._172쪽
주말이면 커피 향기, 와플 굽는 향기, 책의 향기가 어우러진 마당의 북카페는 빈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차 한 잔을 놓고 책에 빠져든 중년의 주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청년, 미끄럼틀에만 매달리는 아이를 번쩍 안아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아저씨, 유모차에 잠든 아기를 돌보며 잡지를 읽는 아기 엄마, 책은 펼쳐두기만 한 채 심각한 고민거리를 나누기도 하고 자지러지게 웃으며 수다를 떨기도 하는 청소년들, 그렇게 세대도 학력도 직업도 가지각색인 사람들이 열람실이자 카페이자 사랑방인 이곳에서 하루하루 다른 표정의 풍경을 그려낸다.
얼마 안 있으면 도서관에 다니며 자란 아이들이 코끼리마당에서 결혼식도 올릴 것 같다. 설계할 당시 건축사에게 아랫마당은 결혼식장으로도 쓸 계획이라고 당부를 하고, 건물이 완성되고 처음 이삿짐을 옮기던 날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난 이쪽으로 걸어 들어갈래, 한번 연습해볼까? 아니다, 신랑은 미끄럼틀 타고 내려오면 짱이겠다…, 신나게 수다를 떨던 아이들 웃음이 햇살 좋은 날 마당에 서면 벚꽃 잎처럼 나풀거리며 내려앉는다. 언젠가 정말 그 아이들이 사랑하는 이와 나란히 서서, 책꽂이들 사이로 들이비치는 햇살이 담쟁이를 키운 시간과 신랑신부의 장난꾸러기 시절을 오롯이 기억하는 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언젠가 책을 읽어주었던 이웃들의 축복을 받으며 생의 또다른 장을 시작하는 풍경…. 그런 날들을 지내고 나면 도서관의 표정은 또 어떻게 바뀌고 어떤 판타지들이 쌓여갈까?_200∼202쪽
03 도서관계의 매력적인 압력단체로
도서관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공성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밋밋한 공공성이 아니라 소통과 참여로 함께 실천해가는 공공성, 그래서 유연하고 섬세하고 즐거운 공공성을 상상했다. 거기서 도서관운동의 이유와 사립도서관의 가능성을 만났다. 공립과 사립의 아주 작은(?) 차이. 사립도서관으로 남기를 고집한다고 해서 울타리를 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상상하는 공공성과 지적 자유가 좀더 적극적으로 구현되도록 자극도 되고 힘도 되는 ‘매력적인 압력단체’가 되고 싶었다._223∼224쪽
‘어린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낼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아이들이 꼭 ‘아이들을 위한’ 환경을 원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이 아이들에게 유익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준에 맞춰 세팅된 환경이 과연 아이들에게 유익하기만 할까? 적어도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해할까? 날마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물음표를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그런 노력이 오히려 아이들을 ‘대상화’할 수 있고, 그 결과 아이들을 수동적으로, 나아가 방어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맘껏 꿈을 꾸라고 격려하고 지원하기보다, 어른들 스스로 책 읽는 즐거움에 빠지고 어울려 배우고 소통하고 꿈을 꾸며 살아가는 풍경을 보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환경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들을 위한’ 환경을 만들려고 시작한 도서관에서 우리는 마침내 ‘아이들과 함께!’라는 다음 단계의 길을 선택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어른들이 언제나 자신을 돌봐줄 거라는 믿음보다 나이 40, 50이 넘어서도 배우고 성장하고 꿈꾸며 살아가는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얻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_238∼239쪽
도서관에서 기부를 바라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부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기부는 곧 자선으로 연결되는 것이 현실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도서관의 기부가 중요하다. 도서관처럼 자선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고 함께 누리는 공공성의 영역에 기부가 이뤄진다면 복지의식과 기부문화가 한 단계 다른 차원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외계층을 ‘위한’ 자선이나 시혜를 넘어, 함께 참여하고 혜택도 함께 누리는 기부문화를 기대하는 것이다. 도서관에 다니면서 자란 소위 어려운 환경의 청년들이 느티나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뜨리지 않는 말이 있다.
“도서관에서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어쩐지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는 도서관에서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지켜가는 데 힘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아이들에게 배웠다. 자존감을 오롯이 살려야 가슴이 뛰고 동기유발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찾기보다는 서로 존중하고 함께 기여하면서 그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길이라는 사실도._252∼253쪽
느티나무도서관이 활동해온 방식은 아주 작은 규모라도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일을 계획하고 시도하고 세심하게 변화와 반응을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읽고 문제를 찾아내 대안을 모색해나가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시도한 사례의 의미가 받아들여지면, 각 지역의 주체들이 그 지역의 특성을 살리면서 느티나무도서관 사례를 채용해 확산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우리가 할 일은 무늬만 베끼는 방식이 아니라 취지와 내용이 잘 전달되도록 우리가 성과를 확인한 아이디어나 시행착오의 경험을 잘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