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반드시 강남으로 가야겠다는 고민해의 의지가 생각보다 강했다.
어중간은 살고 있는 집을 전세로 놓고 강남으로 이사를 갈 경우 대출을 꽤 많이 받아야 하는 데다가 아이들이 적응하기도 어려울 거라며 반대했지만 고민해는 굳건했다.
“이번만큼은 꼭 내 말대로 해야겠어. 강남, 가야겠어.”
결국 어중간은 설득을 포기하고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네 식구가 모여 의견을 나누는 나름의 가풍이었다.
가족회의의 주제가 뭔지 이미 알고 있는 어울림과 어이해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억지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 어린 어이해는 좀 덜하지만 이미 이모 때문에 이런저런 교육의 모르모트가 되었던 어울림의 표정은 완전 똥 씹은 모양새였다.
아이들의 마음을 좀 돌리려는 듯 과일과 각종 쿠키를 가득 담아내 온 고민해가 한껏 옥타브를 높인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자! 오늘은 엄마가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할 거야. 바로 너희의 미래를 위한!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기로 했어!” --- p. 18
“알아, 엄마도. 엄마 귀 얇은 거. 하지만 이건 이사가 걸린 일이야. 집을 옮겨야 하고 사는 환경을 바꾸는 일이라고. 그래서 오래 고민했어. 정말 많이 생각했고 많이 알아봤어. 엄마는 사람이 사는 동네, 중요하다고 생각해. 공부하는 동네에 가면 공부를 할 거고 춤추는 동네에 가면 춤을 추겠지. 괜히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생겼겠어? 그러니 이번만큼은 엄마 말에 따라 주라. 여보. 당신도 이번에는 내 말을 좀 들어 줘. 우리 애들 적어도 남한테 무시당하면서 힘들게 살게 할 수는 없잖아. 미리 인맥도 좀 만들어 주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 주려면 부모가 되어서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본인들이 정신만 차리고 노력하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도록 환경 만들어 주는 거. 그게 부모가 해 줘야 하는 일이잖아. 우리가 조금만 고생하면 애들 인생의 레벨이 달라지는데, 목숨이 걸린 것도 아니고 조금만 고생하면 가능성이 보이는데 그거 안 하는 거……, 난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 직무 유기 같아. 밤에 잠이 안 와.”
고군분투, 남편과 아이들을 설득하던 고민해에게 울컥함이 몰려왔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나 하나 잘 살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 자기네들 위해서 이러는 건데, 왜 만날 혼자만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지 속이 상했다. 이렇게 애써 봐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가족들조차 이해해 주지 않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데다가 친언니에게는 무식하고 안일한 엄마 취급이나 받는 스스로가 너무 서러웠다.
결국 고민해는 말을 마치고 혼자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처음 본 엄마의 눈물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중간도 몹시 당황하며 고민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 당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고, 이게 이사까지 가야 하면……,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거지……, 응? 아, 왜 울어, 울긴. 울지 마.”
“어…… 엄마. 왜 그래? 아까 엄마한테 이모 말만 듣고 귀 얇게 움직인다고 그래서 그래? 아니, 내 뜻은 그게 아니라…….”
식구들이 돌아가며 위로를 하자 고민해의 서러움은 더 몰려왔다. 원래 우는 아이도 달래면 더 크게 울듯이 고민해는 그간의 설움과 고민을 쏟아 내듯 엉엉 울었다.
이날, 어중간의 가족은 최대한 빨리 강남으로 이사를 가는 것으로 하고 가족회의를 마쳤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고민해의 눈물이 억지로라도 강남행을 이끌어 낸 열쇠가 된 셈이었다. --- p. 22
고민해는 몇 년 뒤면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견뎌 보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아파트 단지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하나가 고민해의 희망을 은근히 꺾어 버리고 말았다.
사건의 핵심은 이랬다.
아이들 교육에서 고상해와 거의 쌍벽을 이루는 강남 엄마 한 사람이 고민해와 같은 라인에 살고 있었다. 위로는 딸, 아래로는 아들이 있는 집이었는데, 그나마 고분고분했던 딸은 명문대를 갔고 지금 교환 학생으로 해외에 가 있다고 했다.
문제는 둘째인 아들이었다.
공부에 취미가 없고 춤을 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 집 아들은 동네에서도 유명한 말썽꾼이었다. 오죽하면 뒤늦게 이사 온 고민해도 그 아이를 알 정도였다.
워낙 춤을 좋아하고 공부를 안 하는 아이이다 보니 그 집 엄마가 머리를 쓰고 또 써서 어떻게 무용을 전공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던 모양이었다.
꽤 알아주는 예술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유롭게 춤추고 음악 듣는 것이 좋았을 뿐 무용을 전공해서 무용가가 될 생각이 없던 아이는 자꾸 학교를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학사 경고를 받은 것이다. 사실 학사 경고를 받더라도 재수강을 해서 학점을 이수하면 되는데, 이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흠이 생겼다는 생각에 앞뒤 안 가린 것이 화근이었다.
자기 아이가 맘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자 교수에게 전화하고 찾아간 것이다.
그 엄마는 자기 아들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아이가 학교에 적응을 할 수 있게 교수가 좀 도와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따져 물었다고 한다. 게다가 학사 경고를 철회하고 학점을 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그런데 그게 통하지 않자 무릎 꿇고 사정을 하며 준비해 간 촌지까지 찔러 넣어주려 했다는 거였다.
그렇게 학교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집에 온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학교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잔뜩 화가 난 아이가 집에 오자마자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수년간 엄마의 참견과 억압에 억눌려 있던 아이는 자유로울 줄 알았던 대학 생활에서조차 엄마가 사사건건 참견을 하는 데다 학교까지 찾아가 교수에게 그런 행동을 하니 거의 반미치광이가 된 듯했다.
아이는 15층에서 자신의 물건들을 큰 소리와 함께 밖으로 던졌다. 아래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 몇 대에 물건이 떨어져 경보음이 미친 듯이 울려 대고 길을 다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등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차 세 대가 찌그러졌고 화단의 나무와 풀들은 모두 엉망이 되었다. 있는 대로 물건을 던진 후 말리는 엄마를 복도에 끌고 나온 아이는 온 동네에 쩌렁쩌렁 다 들릴 정도로 울분에 찬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 아줌마야! 그래, 모두 네 맘대로 해. 내가 죽어 줘야 이 짓거리 그만하지? 응?”
아들이 엄마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험한 말이 한 시간여를 동네 구석구석에 떠돌았다. 결국 아이는 경찰이 출동해 사태를 수습하면서 간신히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고민해네 저녁 식탁에서는 낮에 있었던 일이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고민해의 설명을 들은 어중간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대체 왜들 그러나. 애들이 무슨 꼭두각시도 아니고.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그러게. 대학까지 간 애한테 그런 간섭을 하는 건 좀 쇼크였어.”
부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어울림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엄마 근데, 그런 사람들 많던데?”
“무슨 소리야?”
“아니, 우리 반에도 언니, 오빠가 대학생인 애들이 몇 명 있거든. 근데 그 애들이 그러더라고. 언니, 오빠가 학교 과제 할 때마다 엄마, 아빠가 도와주고 그런다고.”
“아니 무슨 대학 과제를 엄마, 아빠가 도와줘?”
“그 애들 말로는 언니, 오빠들은 어학연수 준비하고 토익이나 토플, 그리고 인턴십 같은 것도 준비하느라 너무 바빠서 수업에서 내는 과제 같은 건 엄마, 아빠가 전문 선생을 사서 도와주고 그런다나 봐.”
“뭐? 맙소사. 그럼 대학교 가서도 따로 뭔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거야?”
“가르친다기보다는 과제 대행업 같은 거 아닐까?”
“말도 안 된다, 진짜.”
“근데 내 친구들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그 애들은 무지 당연하게 생각하더라고. 언니, 오빠들도 다 과외도 받고 그런대. 특히 인턴십 가기 전에 면접을 보거나 경력을 쌓으려면 과외가 필수라나?”
“아니, 무슨 과외를 받는데?”
“내가 들었던 것 중에 제일 웃겼던 건, 예쁘게 웃는 과외였어.”
“뭐……? 예쁘게 웃는 과외가 뭐야?”
“이미지 메이킹? 뭐 그런 건데 면접 보고 그러려면 인상이 좋아야 하잖아. 그래서 본인의 얼굴에 맞는 미소 짓는 법을 알려 주는 뭐 그런 데가 있대. 거길 다니면서 웃는 표정 만드는 걸 배운다고 하더라고.”
어울림의 말을 들으며 고민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짝 벌리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 pp. 16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