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 의 연구방법론에 대하여>
역사적 주체인 남성민족주의 주체의 자기 성찰을 보완해주는 계기로서의 여성성이 아니라 근대성의 의미를 심화하고 그 모순적 상황을 드러내는 계기로서 여성성을 밝혀보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입장이다.
우선, 식민지 근대란 특정한 시기의 집단적 역사적 경험이긴 하지만 어떤 불변의 ‘본질’을 지닌 고정된 것이 아니다. 또한, 식민지 근대만큼 젠더 상징주의와 젠더 형상화의 위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다. 그런 위력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담론화된 여성들이었다. 이 책은 식민지 근대라는 특수한 역사적 국면에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그러나 차별적으로 구조화되는 양식을 밝혀내고, 그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분리되며 위계화되는 다양한 여성 (하위) 주체들이 나름의 역사 인식과 정치적 행위성을 창출하려 했던 절절한 노력을 밝혀내기 위해 사회심리학적 접근과 동시에 인문학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여성의 역사와 서사는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만의) 총체적인 서사가 배제하고 은폐하고 혹은 망각한 틈새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읽어낼 때 여성이 주체로 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가 호출/구성되는 역사적 구조화의 유물론적 축과, 그런 개인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정치적 행위주체로서의 축이 교직되는 이중의 양식을 젠더라는 프리즘을 통해 분석해내고자 했다.
이러한 분석 방법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흔히 전근대/근대라는 구분이 표상해 왔듯이, 서구적 근대의 따라잡기로 이해된 한국의 식민지 근대는 그 지정학적ㆍ공간지리적 차이가 시간적 차이로 환원되어 왔다. 그러한 서구적 근대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 집단과 식민지 민족주의 남성 집단이 주변화시켜 온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과 같은 하위주체들의 공간은 비서구적 인식과 상상력을 잠재태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식민지 근대를 여성주의 문화론으로 접근하려는 이 책에서 그 방법론적 개념으로서 ‘여성공간’이 제시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의 중심 내용에 대하여>
식민지 근대 시기의 여성공간은 전통적인 사적 공간인 ‘가정’ 영역이 근대적으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모성공간과 가사노동 공간으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며, 식민지의 근대화를 통해 교육공간, 소비공간, 공적 노동공간과 같은 공적 공간이 새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들 공간은 그동안 식민지 근대를 여성주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주된 통로였던 ‘신여성’ 외에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며, 또한 그들 사이의 정치경제적 차이들이 각인되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기에 구축되는 여성공간들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를 더 꼽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서로 분리되어 보이는 여성공간들이 그 토대인 가부장적 식민주의 자본과 연결되어 공사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민족, 계급, 젠더의 복잡한 동시적 상호작용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생성하는 균열이나 모순에 초점을 두는 여성주의 문화론적 분석은 식민성으로 인한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는 비서구적 근대성의 자원을 찾아내는 데 유효하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이 책의 1부는 식민지 근대를 여성주의 문화론으로 접근한다고 할 때 필요한 이론적 논의들로 구성된다. 공간 혹은 여성공간의 문제설정, 일본이라는 비서구제국주의 경험의 특수성과 그에 따른 조선 식민지 여성의 반응, 그동안 뭉뚱그려 논의되어 온 ‘신여성’의 세밀한 범주화를 통한 계보 그리기가 그 주된 내용이다. 2부에서는 식민지 근대 시기의 여성공간 중에서 사적 공간 범주에 속하는 섹슈얼리티, 소문담론, 모성, 음식, 부엌 공간을 다루며, 3부에서는 공적 공간에 속하는 소비, 교육, 공적 노동, 디아스포라 공간을 다룬다. 2부와 3부에서 분석되는 자료들은 식민지 근대 시기 중에서 주로 2, 30년대에 나온 신문, 잡지, 문학작품들이다. 식민지 근대에 한국어가 근대적 표현의 가능성을 얻게 되고 민족언어 구성원이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문자문화의 공간이 형성되기 때문에 식민지 근대에 나온 문자문화 매체들이 중점적으로 활용된다.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의 출간이 갖는 의의에 대하여>
그동안 식민지 근대는 역사와 시간성을 중심으로, 거의 대부분 억압/저항, 제국주의/민족주의, 전통/근대, 수구/진보, 식민화/근대화와 같은 이분법적 틀에 따라 주로 사회학적, 역사학적, 문학사적 담론들로 규명되어 왔다. 이 책은 식민지 근대를 젠더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서로 배타적으로 이해되어온 식민성, 근대성, 여성성을 이제 단일한 체계가 아닌 복잡성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 식민지 근대가 여성성과 조우하면서 드러내는 복합적 의미들을 밝혀내고 있다. 이렇게 식민지 근대 분석에 젠더를 문제틀적 개념으로 사용함으로써 무엇보다 남성중심으로 획일화, 규준화된 담론체계로서의 근대가 주변화시킨 비근대적 혹은 여성적 시공간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고자 했다. 젠더범주를 통해 식민지 근대를 접근하는 것은 식민지 근대 체험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행의 경로에 고착된 대상이 아니라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의 식민지 근대를 문화론적으로 접근하되 젠더의 관점을 개입시켜 그동안 지극히 부차적인 것으로 배제되거나 은폐되어 온 여성의 일상생활과 욕망을 가시화하고 재해석하는 이 책은 식민지 근대성을 좀더 역동적이고 풍부하게 규명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한국 학문이 자생할 수 있는 기초를 닦기 위해 2002년에 시작한 기초학문 지원사업에 의해 시작된 세미나를 거쳐 씌어졌다. 연구책임자와 네 명의 공동연구원 외에 여러 분들이 직접 몸으로 또 온라인으로 이 세미나에 참석함으로써 이 책을 풍성하게 하여 주었으며 서서히 축적되어 가는 여성연구자들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