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우스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음악 선생님 하스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음악 수업을 하면서 루치우스의 음악적 재능이 형편없음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치우스가 노래를 부르면 학생들은 꽤나 즐거워했지만, 음악 선생은 절망하곤 했었다.
“야, 하일너, 넌 대체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부끄러워? 너희들 앞에서?” 그는 경멸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 “천만에, 이 친구야!”
하일너에게 우정은 즐거운 사치이자 위안 혹은 한낱 장난이었다. 하지만 한스에게 그것은 자랑스러운 보물이자 때로는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나타난 어찌할 줄 모르는 미소의 배후에, 불안과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무너져 가는 한 영혼이 있음을 보지 못했다.
한스는 왜 하필이면 오늘 그날 일이 떠올랐는지, 왜 그 추억이 이처럼 아름답고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왜 그 추억이 자신을 이다지도 비참하고 슬프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행복의 고통을 남기기 위해, 추억의 옷을 입고 자기 앞에 나타났음을 깨닫지 못했다. 머릿속이 온통 어젯밤 에마와의 일로만 가득 차 있는 이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것만 감지할 수 있었다.
한스 기벤라트는 온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수재이다.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나 마을의 목사 같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린 한스는 공부에 방해되는 모든 놀이를 포기하고 공부에만 매진한다. 과도한 학업이 어린 소년에게 가져다줄 안 좋은 영향에 대해 구두 장인 플라이크만이 걱정을 한다. 작은 마을 출신으로 어려운 주 시험을 차석으로 통과해 한스는 온 마을의 자랑거리가 된다. 한스는 입시 공부로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입학 전까지 좋아하는 낚시를 하고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학교에서 앞으로 할 공부에 대한 예습이 필요하다는 목사님과 교장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다른 아이들처럼 방학 중에도 마음껏 쉬지 못하고 수학과 히브리어를 공부하게 된다. 신학교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 한스는 개성 강한 학우들과 지내면서 학업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데 시인을 꿈꾸는 헤르만 하일너라는 반항적인 천재와 사귀면서 한스는 성적에만 가치를 두는 자신의 사고방식이 옳은 것인지 회의하기 시작한다. 헤르만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학교의 주입식 교육과 엄한 규율이 점점 구속으로 다가오게 되고 한스의 성적은 점점 더 추락하게 된다. 헤르만이 감옥과도 같은 신학교의 담을 넘어 며칠간 마음대로 나다니다 결국 마을에서 붙잡혀 온 뒤 퇴학을 당하고 혼자 남게 된 한스는 친구들의 무시, 학교 선생님들의 무관심 속에서 마음의 병이 점점 더 깊어진다. 헤르만의 퇴학 이후 심신이 완전히 무너진 한스는 성적은 말할 것도 없고 두통과 환각에 시달리다가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된다. 과도한 긴장으로 신경쇠약 진단을 받은 뒤 고향에 돌아온 한스는 예전과 다름없는 자연을 통해 위로를 받지만 그에게 성원을 보내줬던 사람들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한스를 냉랭한 시선으로 대한다. 한스는 구두장이 플라이크의 조카딸인 에마에게서 짜릿한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짧은 만남이 덧없이 끝남으로써 더 깊은 좌절감을 맛본다.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한스는 견습 기계공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일주일의 익숙지 않은 노동 뒤 일요일에 한스는 동료들과 어울려 놀러간다. 술집에 들러 처음으로 과음을 한 한스는 의식이 흐릿한 상태에서 혼자 귀가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한다. 목격자가 아무도 없어서 그의 죽음이 사고사였는지 자살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한스 기벤라트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다시 고향에서 유명한 존재가 되지만 장례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곧 자신들의 일상세계로 되돌아간다.
이 소설은 부모와 후견인 그리고 교사들에게, 실용주의와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사회가 어떤 식으로 건강하고 재능 있는 한 젊은이를 파멸로 몰아넣는지를 환기시켜주는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한다. 뿌리를 잘라버림으로써 채 자라지 못한 어린 줄기를 말라 죽게 만드는 사회 말이다. 아르투어 엘뢰서
하나의 경향소설? 물론이다. 따뜻한 가슴의 언어로 길어 올린, 젊음을 갈망하는 청춘의 권리가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테오도어 호이스
내가 살아 있는 한 난 헤세의 편에 설 것이다. 관습적 어리석음이 빚어낸 끔찍한 결과를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이 작은 소설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유효성을 인정받을 작품이다. 평화와 아름다움과 행복감을 늘 가슴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한 존재의 진지한 언어는 삶의 공포적 상황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는 한스 기벤라트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보면서 나치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나의 어리석은 스승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헤세의 이 작품을 통해 문학을 통한 연대감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나는 기꺼이 헤세의 작품을 함량 미달의 교육자들이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부당한 행위에 대해 조소와 증오로써 응징하고자 하는 타당한 보복 행위로 간주하고 싶다. 가브리엘 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