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론으로 경제학을 정의하는 대부분의 경제학 책들은 ‘경제학을 하는’ 옳은 방법이 신고전주의적 접근법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신고전주의 학파 외의 다른 경제학파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제학 책도 있다.
그러나 다루는 대상으로 경제학을 정의하는 접근법을 택한 이 책에서는 경제학을 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각 학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와 맹점, 장단점 등을 함께 다룰 것이다. 결국 우리가 경제학에 바라는 것은 특정 경제학 이론이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현상을 최대한 잘 설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p. 35
다른 사람이 내린 결정의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 경제학을 하는 다양한 접근법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최저 임금, 아웃소싱, 사회 복지, 먹거리의 안전성, 연금 등등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경제 정책과 기업의 결정 뒤에는 어떤 경제학 이론이 있기 마련이다―그 결정에 영감을 제공하든지, 더 흔하게는 힘을 가진 자들이 어차피 하고 싶었던 행위를 정당화하든지 하면서 말이다. --- p. 166
현대 사회는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새로운 사회 또한 공장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른바 산업화 후 사회에서도 이른바 새로운 경제의 동력이라고 여겨지는 서비스 산업은 역동적인 제조업 부문의 뒷받침 없이는 융성할 수 없다. 서비스 산업이 주도해 번영을 이룬 경제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는 스위스와 싱가포르가 (일본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세 나라 중 두 나라라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 p. 269
잉글랜드 은행의 금융 안정성 담당 상임이사 앤디 홀데인은 (새 금융 상품 중 복잡한 편이기는 하지만 제일 복잡하지는 않은) CDO-제곱 상품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투자자는 10억 페이지가 넘는 정보를 흡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 또한 파생 상품 계약서가 수백 페이지에 달하기 때문에 다 읽을 시간이 없다고 고백하는 은행가들을 종종 만나 보았다. 이 정보 과다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복잡한 수학적 모델이 개발되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좋게 말하면 매우 부족한 정도였고 최악의 경우에는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잘못된 안전감만 안겨 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 모델들에 따르면 2008년 위기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 복권에 연달아 스물한 번 내지 스물두 번 당첨될 확률과 맞먹는 것으로 나온다. --- p. 296
금융 시스템을 더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고 해서 금융이 경제의 중요한 부분임을 부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금융이 갖는 위력과 중요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고작해야 말을 타고 달리는 게 가장 빨랐던 시대에는 교통 신호도, ABS 브레이크도, 안전벨트도, 에어백도 없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규제 등을 통해 사용을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들이 강력하고 빠르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잘못되면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금융에도 적용되지 않고서는 자동차 충돌 사고, 뺑소니 사고, 심지어 고속도로 다중 추돌 사고에 해당하는 금융 사고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p. 306
현재 14억 명, 그러니까 세계 인구 5명 중 1명이 하루 1.25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고 있다. 다차원적 빈곤으로 따지면 절대적 빈곤 속에서 사는 사람의 숫자는 17억 명, 즉 4명 중 1명으로 늘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 숫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의 70퍼센트 이상이 중간 소득 국가에 살고 있다. 2000년대 중반 현재 중국 인구의 13퍼센트인 1억 7000만 명, 인도 인구의 42퍼센트인 4억 5000만 명 이상이 국제 빈곤선에 못 미치는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 --- p. 332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 p. 441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문제를 특정 이론의 관점에서만 보면 특정 질문만 하게 되고, 특정한 각도에서만 답을 찾게 된다. 운이 좋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못’이라면 손에 쥔 ‘망치’가 안성맞춤의 도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물론 누구나 가장 마음에 드는 이론이 있다. 특정 이론 한두 개를 더 자주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고들 있다. 그러나 부디 ‘망치만 쥔 사람’, 더욱이 다른 연장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은 되지 말자. 이 비유를 조금 더 확장해서, 다양한 임무에 맞춰 서로 다른 연장이 달린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 p. 443~444
에필로그-정치가 실패한 나라
‘불황 10년’이라는 제목으로 모아놓은 나의 글들은, 아주 드물게 ‘약은 해법’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몇 십 원을 더 내는 정도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지만,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이 움직이는 일에 대해서는 옳은 것보다는 약은 것이 더 먼저일 수밖에 없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그렇지만 너무 약은 해법만으로 이야기들을 구성하지는 않았고, 옳은 것과 약은 것에 대해서, 아주 긴 시선으로 한 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고 노력했다.
일본과 한국이 지독할 정도로 닮은 하나가 있다면, 정치는 ‘끝판왕’, 정말로 후진적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과 일본은 특이한 정치 구조 안에서도 사람들이 죽어라고 열심히 살아서 이만한 모습이라도 가지게 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경제가 힘들어지면 정치가 좀 더 현명해지고 고분고분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이나 일본이나 경제가 힘들어지니까 정치가 더 난리를 친다. 아주 곤란한 상황이다. 20년 전 일본이 어떻게 했는지, 예를 들면, 골프장이나 테마파크, 지방 공항 건립과 같은 초기 대처에서 고이즈미 시절의 우정국 민영화까지…… 이미 우리가 충분히 지켜본 상황이다. 그런데 그 20년 뒤를 우리의 정치인들이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복사본이라고 할 정도로 똑같이 하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정치를 바꿔 우리의 삶을 바꾸자! 맞는 이야기인데, 냉정하게 말하면 일본에서도 아직,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그런 가능성은 전혀 안 보인다. 한국에서는 20대, 일본에서는 30대가 이미 한 번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이 정도면 정치권이 움직여 그 사회의 자원 배분을 크게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맞는데, 끝까지 부동산 버블로 결국 여러 채의 집을 가진 사람들을 살리는 방향의 결정을 한다.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조치인데, 한일 양국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치가 먼저 변화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맞는 방향이기는 한데, 불행히도 그게 향후 10년 내에는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한국의 정치가 10년 내에 좋아질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전에 좋은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삶이 먼저 무너질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그런 사례가 몇 번 있었는데, 1929년 대공황 이후 무너진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좋은 정치를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먼저 망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로서, 정치가 실패했다고 해서 개개인의 삶도 실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개인이 살아남아야 더 넒은 차원에서 다음 단계의 구상이나 도약을 도모할 수 있는 있다.
이 책에서 내가 각 분야에 대해 분석하고 제시한 내용은 친밀하고도 사랑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해준 조언의 기본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정리한 것이다. 대부분 ‘약은 방식’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지금의 한국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국민’인데, 정부 부채에 비하면 개인 부채가 너무 많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시나리오가 일본처럼 ‘가난한 나라에 부자 국민’이 되는 경우이다. ‘가난한 나라에 더 가난한 국민’, 이건 중남미의 여러 국가가 걸어간 길인데, 그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들이라도 부채를 좀 털고, 씀씀이를 조정하고, 저축을 늘려서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모자 9개를 가진 사람과 모자 1개를 가진 사람의 만남’과 같은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모자 9개를 가진 사람이 결국 1개 가진 사람의 모자를 빼앗아서 10개를 채운다는. 우리 대부분은 모자 1개를 가진 사람들이다. 불황 10년을 맞아 우리가 치르게 될 게임의 기본은 자기 머리에 딱 1개 있는 모자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10년, 독자 여러분의 ‘그 모자’가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의 머리 위에 있기를 기원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