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여행길에서 아주 드물게, 역시 혼자 걷고 있는 여성을 본다. 그럴 때면 늘 주책맞은 호기심이 일곤 했다. '저 여인은 어떤 사람이길래,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걷고 있는 걸까'하는... 말을 붙여 인사라도 나누고, 시한부일지언정 말벗이라도 된다면 이 팍팍한 길 위에 새뜻한 추억 한 장 같이 깔며 갈 수 있을텐데...하는 턱없는 소망이 일기도 했다. 비단 나뿐만이 아;
리뷰제목
혼자 떠난 여행길에서 아주 드물게, 역시 혼자 걷고 있는 여성을 본다. 그럴 때면 늘 주책맞은 호기심이 일곤 했다. '저 여인은 어떤 사람이길래,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걷고 있는 걸까'하는... 말을 붙여 인사라도 나누고, 시한부일지언정 말벗이라도 된다면 이 팍팍한 길 위에 새뜻한 추억 한 장 같이 깔며 갈 수 있을텐데...하는 턱없는 소망이 일기도 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건강하고 건전한 모든 남성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는 감정일 것이다.^^ 여행길 위에서는 바람 들어 헐거워진 마음이 절로 열리지 않는가. 그렇게 열린 마음은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의 내밀한 속내를 알아도 될 것 같은 잔망스런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다. 길 위에 홀로 선 사람... 남자건 여자건 그이만큼 많은 비밀과 사연을 갖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있을까. 그 길 위에서 난 궁금했었다. 알고 싶었다. 소통의 갈증으로 목말라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길 위의 여성'이 어떤 느낌과 생각들을 밟고 씹으며 걷고 있는지를 '낱낱이 까발린' 발칙한(?) 책을 그만 읽고 말아버린 것이다. '낱낱이 까발렸다' 함은 그 고백의 솔직대담함에 놀랐기에, '발칙하다' 함은 전혀 새로운 형식의 여행책 앞에서 당혹감을 느꼈기에, '읽고 말아버렸다' 함은 읽어서는 안될 일기를 훔쳐본 듯한 두근두근함이 있었기에 다소 장황하게 표현한 말이다.
지금은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김남희씨가 우리 땅 구석구석을 온몸으로 부대낀 흔적을 남긴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난 걷기여행'은 우선, 새롭다. 이미 우리 국토를 다룬 수많은 여행책들이 나와 독자를 떠나라고 손짓하고는 있다. 그 중에는 '여행'이라기보다 '관광'을 위한 정보 소개와 나열에 그치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을 본 뒤 왜 우리는 헛헛한 공복감을 느끼는가. 거기엔 '명소'만 한상 가득 차려져 있고 그것을 먹고 소화하는 주체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문사들이 깊이 있는 글로 써내 인문교양의 향기 빼어난 여행서들도 있다. 이런 책들에서 우리는 왜 더부룩한 소화불량을 느끼는가. 거기엔 기름진 머리 무거운 주체만 있고 맛있게 교감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한 달 간의 국토종단을 날적이 형식으로 써나간 1부와, 걷기 좋은 흙길 10곳을 다녀본 소감을 밝힌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좀 많이 다르다. 일기같은 글 행간에 무엇보다도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난다. 곤궁의 맨얼굴로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따뜻한 교감이 구석구석 스며 있다. 그 과정에서 저자의 삶이 자극받고, 나아가 그 새로운 깨달음을 담는 자신의 그릇이 커져가는 변화의 모습도 생생히 드러난다. 발의 물집을 터뜨려가며 걷는 국토종단길, 그녀는 자신의 삶의 물집 역시 하나하나 고통스럽게 터뜨려간다. 길 위에서 조금만, 정말이지 조금만 아집의 물집을 터뜨려 마음의 틈을 연다면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이 쏟아져나오고 새 세계가 열리는 것을... 혼자 길떠남을 좋아하는 나는, 땅과 산과 물만 보며 걸었던 나 자신의 폐쇄적 외곬 여행에 절로 뜨끔해졌다. 저자는 내게 '인간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은 인간에 대한 둔감함'임을 새삼 상기하게 해 준 열린 감성의 소유자였다.
사실 그녀의 글은 저 높은 곳에서 독자를 굽어보며 압도하지 않는다. 문자향 짙은 미문이라고 할 수도 없을 듯하다. 일기나 편지를 쓰듯, 대화를 나누듯 그저 편안하고 재치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온갖 수사의 껍질과 관념의 기름기를 뺀 이 담백한 글은, 그렇기에 바삭바삭 감칠맛으로 씹힌다. 한번 잡으면 단숨에 읽어나가게 할 정도로 속도감 있고 위트 넘치는 글이다. 사실 처음 책표지에 실린 저자의 사진을 보고 갸우뚱했다. ‘전혀 소심하고 겁많고 까탈스러워 보이지 않게 생겼는데?’하고 말이다. 그리고 책을 펴들고 여행기 첫 부분을 읽어봐도 그랬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 스님 등 수많은 사람들과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어우렁더우렁 얽혀드는 모습이 재미있어 절로 미소를 지었고, 그 넉살좋음에 질투 섞인 부러움도 느꼈다. 그런데 중반 이후 한참 읽으니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움’을 넘어 저자가 대단히 여리고도 섬세한 감성으로 단단히 무장했다는 것을. 그 다듬고 벼린 감성의 촉수가 길 위의 사람과 사물에 닿으면 곧 온몸으로 전율한다. 주목하고 싶은 건, 이런 순간에도 화장 짙은 표현을 동원하거나 싸구려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수식 없는 날것 그대로의 절절함을 전한다는 것이다. 웃으며 읽다가도 저 눈밝은 예리함에 찔리고, 이 진정어린 뜨거움에 데이기도 한다.
헤밍웨이가 "가장 훌륭한 글은 사랑할 때 나온다"고 했듯이, 그녀의 글에는 우리 땅과, 거기 발 딛고 질척이는 사람들에 대한 사무치는 사랑이 묻어있어, 아름답다. 이 사랑의 대상은 막연한 자연과 사람들로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죽음의 위협 무릅쓰고 기어가는 달팽이, 피하려다 자신이 잘못 밟아 죽인 여치 등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모든 것들이다.
슬프지 않고는 아름다운 길이 없다고 했던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장면과 경험들이 길 따라 이어진다. 이같은 '경이'를 직접 포착해낸 사진들이 눈을 촉촉하게 한다. 연민의 필터를 끼운 카메라로 찍은 이 사진들은 소박하고 정겹다. 다만 몇몇 컷들은 인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다.
또 아쉬운 점을 찾자면, 지도 표기가 좀 더 친절했으면 하는 점이다. 실제 걸은 여행길을 별도의 선으로 표시했더라면 눈에 확 들어왔을 것이다. 2부 각 길편 말미에 첨부한 여행정보는 형식치레에 그치지 않는 상세한 안내가 돋보인다. 지역과 길에 대한 개요, 명칭 유래에서 교통, 숙박 안내까지 꽤나 꼼꼼하고 빼곡히 챙겨놓아 실제 여행길을 떠날 때 유익할 것 같다.
이 책은, '여행'이 아닌 '위생처리된 관광'과 그 사전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행지의 인문지리에 대한 전문적 깊이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인문학적 향기 넘치는 '기행 교양 독서'를 고고히 즐기는 분들에게도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길이 곧 집'인 영혼의 자유를 맛봤거나 맛보고 싶어하는 분들, '불안 없이 자유 없다'는 말에 동의하는 분들, 혼자 떠난 길 위에서 이유모를 슬픔에 몸을 떨어본 분들, 그리고 사람 냄새와 온갖 날감정이 풍요롭게 넘치는 여행서를 원했던 분들께 강력 추천한다.
아울러 소박하게 일상의 진부함을 가끔은 헝클어뜨리고 '끈 풀린 연'이 되어봤으면 하는 모든 분들께도 한 권 건네고 싶은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이렇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쯤이면 걷는 동안 내내 마음을 어지럽히던 수많은 생각의 갈피들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머릿속이 말갛게 비워진다. 아무런 상념도 없이 무심하고 담백한 눈으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이 찰나의 비워짐을 잊지 않는 한, 걷는 행복을 포기하지는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