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일본도 학력 사회다. 유치원 시절부터 명문 사립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경쟁이 치열하고 도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10수씩 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나라의 지식 경제부에 해당하는 대장성 안에서는 도쿄 대학 출신이 아니면 힘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한국보다 오히려 더한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닥에서부터 올라간 이른바 ‘다다키아가리에 대한 대접 또한 융숭하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그만한 업적을 이루느라, 또는 그만한 지위에 오르느라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하는 인지와 존경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르다. 아무리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해도 그 사람 학력이 형편없으면 그 업적마저 사정없이 비하된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바다출판사, 1999)가 나온 뒤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의대 교수가 자기 전공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서울대 의대도, 연세대 의대도 아닌 ‘기타’ 의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에서 신정아류의 기형 불행은 태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은 불행하게 인생을 끝내야 했던 노무현은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판사, 변호사를 거쳐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줄기차게 조롱당해야 했다. 그를 조롱하는 것이 ‘국민적 스포츠’가 되었고, 심지어는 명색 대통령인 그를 앞에 두고, 한낱 평검사가 “당신 학번이 어떻게 되느냐”라는 소리까지 냈다. 생중계되고 있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였다. 그리고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어디 그뿐인가, 부관참시까지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 한국 영화가 지향하는 꿈의 목표라는 1000만 관객을 가볍게 훌쩍 넘어 버린 영화 「변호인」 때문에 새삼스레 두드러진 바 있지만, 노무현에 대한 추모 열기는 역대 그 어느 치자治者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지극하다. 그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비롯되었을 텐데, 어찌하여 그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그토록 그에게 가혹해야 했던가. 지금 추모하고 있는 그들 가운데 적어도 상당 부분은 과거에, 묵시적이든 명시적이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든 추세에 휩쓸린 것이었든,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지 않은가. 그래서 그에 대한 조롱의 가학성은 더 잔인해 보인다. ---pp.69-70
다나카 가쿠에이
노무현과 견줘 볼 만한 일본인으로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있다. 그는 초등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뒤 건설 현장에서 굴러다니다가 졸병으로 징집되었고, 의병 제대한 뒤에는 다시 건설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스물아홉에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서른아홉에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30대 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1972년 7월에 마침내 강력한 라이벌인 도쿄 대학 출신의 엘리트 후쿠다 다케오(, 1905~1995)를 물리치고 총리에 당선된다.
그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천재’,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 ‘정치가인 동시에 정상배’, ‘컴퓨터 달린 불도저’, ‘금권 정치의 대명사’ 등 다양하지만, 전후 일본 정치의 ‘최대의 풍운아’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그리고 가방끈 길이 때문에 그를 야유한 사람은 그의 현직 시절에도, 은퇴 후에도 없었다. 역대 총리 수십 명 가운데 가장 높은 평점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일본 전통에서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pp.70-71
선비 정신
선비 하면 떠오르는 연상은 기개, 지조, 고매, 청빈, 충절, 학식, 박덕薄, 그런 것들이다. 선비의 자격 조건이기도 한 그것들은 선비로서 당위다. 그런 당위는 줄기차고 엄격한 수신修身, 수기修己에 의해서만 이룩된다. 선비는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처럼 알아야 하고, 물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하며,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어서는 안 되며, 명리名利를 위하여 지조를 굽혀서도 안 된다. 멸사봉공과 인격의 완성, 그것이 선비의 목표이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의 이 말씀은 선비의 궁극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선비의 이런 기준이나 정신은 사무라이의 철칙인 ‘충성, 희생, 신의, 염치, 예의, 결백, 명예, 용기’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다른 점이라면 사무라이의 그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쪽이었지만 선비의 그것은 잘 지켜지지 않는 쪽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무라이들이 선비들에 견줘 특별히 고매한 인품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에 각오해야 하는 형벌의 차이 때문이다. 그것은 곧 붓의 계율과 칼의 계율 차이다. ---pp.172-173
일본의 가마우지
산업 쪽에서 ‘일류’, 굳이 그런 쪽에서 살펴보자면 우리의 대일 무역은 언제나 적자 상태였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아베노믹스의 기조인 엔저로 말미암아 대일 무역 적자가 급증했다고 하는데, 이건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수출입국Y"出立國을 표방하고 있는 한국은 죽도록 수출하여 다른 나라에서 벌어 온 돈으로 막중한 대일 무역 적자를 메워야 한다. 그래서 한국은 일본의 실익에 크게 기여하는 가마우지가 된다.
텔레비전에서 일본 어부들이 가마우지를 이용하여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는데, 어두운 밤, 횃불을 밝힌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 참 볼품없이 생긴 가마우지를 바다에 풀어 놓으면, 가마우지는 길고 끝이 구부러진 주둥이로 불빛을 보고 몰려온 물고기를 재빨리 낚아챈다. 그러나 삼킬 수는 없다. 목이 끈으로 졸라매어 있기 때문이다. 어부는 가마우지 다리에 매어 놓은 밧줄을 끌어당겨, 가마우지 입에서 고기를 꺼낸다. 기묘한 이 고기잡이는 새벽까지 이어지고, 날이 밝아 올 무렵, 어부는 비로소 가마우지 목을 졸라맨 끈을 풀고 가마우지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 준다.
그 생김마저 흉한 가마우지에 한국을 빗댄 것은 1988년, 일본인 경제 평론가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 1932~2010)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한국의 붕괴』에 이렇게 썼다. 천천히, 꼭꼭 씹어 읽어 보시기 바란다. 속, 부대낀다. “한국 경제는 목줄에 묶인 가마우지 같다. 목줄(부품·소재 산업)에 묶여 물고기(완제품)를 잡아도 곧바로 주인(일본)에게 바치는 구조이다.” 반론은 없었다. 수치스럽기는 하지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의 가마우지가 되었다. 처량할 수밖에 없는데, 처량할 수밖에 없는 그 입지로부터 벗어나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심히 칼을 갈아야 하는데, 허구한 날 궐기 대회 따위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 pp.270-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