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과 증여는 '물'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해 간다는 점에서 보면 매우 비슷하지만, 목적하는 바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증여의 경우는 선물은 '물'=대상으로서, 보내는 사람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중간적 대상인 셈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중간적 대상'이라는 표현이 쓰일 경우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체내에 있었는데, 배설된 순간 이미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단순히 '물'로 취급될 운명에 처해 있는 대변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 연상됩니다. 유아들은 대변에서 자신의 인격의 일부를 발견하고 언제까지고 집학하는데, 증여에도 그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것을 나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인격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중간적 대상을 상대방에게 보냄으로 해서, 증여는 사랑이나 신뢰가 전달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랑의 유동을 중개하는 '물'은 필연적으로 중간적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겠지요.
하지만 교환에서는 '물'과 인격이 철저히 분리됩니다. 따라서 교환이 이루어지는 자리에는 경계가 모호한 중간적인 대상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윤곽이 뚜렷하고 적절한 가치척도에 의해 명확한 가치 계산도 가능한, 분리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나와야만 합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그런 상황을 '거새'라고 합니다. 거세란 어머니의 체내에서의 생활을 즐기던 아이를 어머니 곁에서 떼어내서 개체로서의 명확한 윤곽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런 생각은 경제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컨대 증여를 거세한 곳에 교환이 출현하는 셈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현대의 증여는 교환의 원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그 원리를 지탱하는 거세의 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뒤엎으면서 실천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43-44
욕망을 통해 사랑과 경제는 연결되어 있다
경제가 오늘날 생활의 합리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리성은 표면에 나타난 가식적인 표정에 불과합니다. 경제는 표면에 가장 가까운 층은 합리성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뿌리는 어두운 생명의 움직임에까지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전체성’을 갖춘 현상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전체성 안의 심층 부분에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융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도 욕망의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들의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p.18
증여론적인 토대 위에
마르크스는 “네가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그에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너의 사랑이 사랑으로서 그에 화답하는 사랑을 탄생시키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썼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사랑 받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사랑의 본질은, 바로 증여로서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생물인데, 그 사이에 화폐가 편입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사랑의 유동이 정지하고, 그럼으로써 사랑의 증여적인 본질이 교환 원리에 의해 혼란스러워지고 전도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 p.154
침묵하는 자연
교환의 원리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 ‘테크네’적인 근대기술을 발달시킴으로 해서, 인간은 ‘침묵하는 자연’을 직접 목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신화적인 사고가 행해지던 세계에서는 이런 광경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동물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식물도 인간과 동일한 말을 사용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자연이 인간의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된 현재에도 예전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이 적절한 방식으로 말을 건다면 동물들도 응답해줄 거라는 갖고 있기도 했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연을 향해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을 거는 바람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전체가 침묵을 지킨 채, 아무런 응답도 해주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