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문체와 차분한 어조로 빚어내는 여태천의 시법(詩法)은 ‘여백의 조각술’로 불릴 만하다. 말의 최소화로 여백을 창조하는 시, 의미의 증식이 아니라 의미를 붕괴함으로써 인생의 공허를 드러내는 시. 그의 시는 문학의 촉수가 지금 여기, 우리 일상의 한복판에 드리워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가벼운 기교를 넘어선 무기교의 기교를 선보인 그의 시는 우리가 회피하고 싶은 인생의 공허, 은폐하고 싶은 일상의 무의미를 폭로한다.
최승호(시인)
의미가 제거된 채 장식으로 남은 말들의 공허함이 시의 주제인 ‘의미 없음’과 어우러지며 진공 상태를 만들어 낸다. 삶의 의미 없음을 미학적으로 표현해 낸 상징들인 이 언어들이 짜임새 있게 엮이어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다.
문혜원(문학평론가, 아주대 국문과 교수)
이미 끝나 버린 게임이 마지못한 보충 수업처럼 진행되고 있는 8회 말의 관중석을 생각한다. 오늘도 몰락하고 있는 팀의 팬들은 차라리 한잔하러 이미 근처 술집으로 떠났다. 그런데 한 사내가 텅 빈 관중석에 앉아 저무는 햇살 속에서 외야의 잔디와 함께 느릿느릿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는 지구에 적응하지 못하는, 진화의 어떤 단계의 황혼을 걷는 생물처럼 거듭 공을 피해 스윙하는 자를 바라본다. 이 사내는 그 자신의 운명을 거울처럼 연기(演技)하고 있는 이 8회 말의 타자를 애통해하지도 않고 증오하지도 않는다. 그저 텅 빈 운동장의 바람이 그렇듯 시간은 흘러가고, 인간들은 흩어진다. 여태천의 시는 관중석에 남아 맹한 눈길을 인간의 운명에 던지고 있는 이 사내처럼 그렇게, 동요와 격정에서 오는 피로와 집착 없이, 우리 삶의 비극적 국면을 담담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런데 이 담담한 시선은 왜 이리 위안을 주는 것일까?
서동욱(시인, 문학평론가)
여태천은 초월이 아니라 현상을 말한다. 여태천 시의 표면은 이면의 외양이 아니다. 표면 아래에는 이면이 아니라 또 다른 표면이 있어서, 이 두 표면이 접속하면서 어떤 슬픔이, 무의미해서 더욱 쓸쓸하고 무의미해서 더욱 아픈, 그런 슬픔이 떠올라 온다. 국자를 들고 하는 스윙이 바로 그런 것. 그들은 모두 떠오르면서, 동시에 사라진다. 그게 플라이 볼이다. 당신을 잡아챌수록 당신은 그 잡아챔 속에서 바스라진다. 그 사라짐을 감내해야 진짜 프로다. 당신과 내가, 저 부동하던 세계가, 모든 석화된 것들이, 이제 사라짐으로써 가득 차기 시작한다. 이 기미(機微)로 가득 찬 시편들은 실로 아름답다.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