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이 됐지만 열두 살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볼품없고 깡마른 소년 갈루아. 루이르그랑 왕립 중학교 2학년. 시험에서 낙제해 2학년을 한 번 더 다니게 됐지만 자아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다. 친구들도 선생들도 교장도 모두 적이라고 느끼며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갈루아에게 부르라렌의 시장인 아버지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학창 시절 열심히 배워야만 한다고 다그친다. 그러던 어느 날 수학을 가르치는 베르니에 선생의 유클리드 강의는 갈루아에게 수학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는다. 수학의 혼에 자신을 바칠 것을 맹세한 갈루아는 곧바로 도서관에 가서 유클리드의 책을 빌려온다. 젊은이가 첫사랑을 품에 안 듯, 가슴에 꼭 껴안고. 그후 얼마간 그는 밥 먹는 것도 마다고 책읽기에만 몰두한다. 열병을 앓듯, 기하학의 영원한 진리에 빠져든다. 순수한 수학을 추구하는 일만이 타락한 세계와 가장 동떨어진 숭고한 일이라고 여기며 앞서간 수학자들, 아르키메데스와 파스칼의 업적을 혼자서 공부해 나간다. 방학 동안 아버지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수사학에 매진할 것을 종용하지만, 갈루아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깊은 그늘을 본다. 어머니는 종교에 점점 더 빠져들고, 아버지와 교회와의 갈등이 깊어짐을 느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수학뿐이라고 느낀다. 혁명의 분위기가 날로 무르익어가지만 갈루아의 생각은 오직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는 데에만 가 있다. 베르니에 선생의 권유에 따라 루이 리샤르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꿈을 키우던 갈루아는 현실의 혼돈을 벗어나고 육체의 본능을 물리치는 것만이 수학의 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마치 고행의 수도승처럼. 그러나 리샤르 선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만다. 그리고 5차 방정식의 해를 구했다고 생각했으나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낙담하자, 리샤르 선생은 어려운 환경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동시대인 수학자, 닐스 헨리크 아벨의 얘기를 들려준다. 그에 용기를 얻어 논문을 작성해 아카데미의 오귀스탱 코시에게 보낸다.
그러나 곧바로 아벨 또한 그의 논문이 아카데미에서 인정받기 몇 달 전 죽었다는 소식과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접한다.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작태에 실망하고 아버지의 죽음 이면에 예수회의 음모가 있다고 여긴 갈루아는 복수를 맹세한다. "샤를 왕조와 교회가 타도되지 않는 한 파리는 감옥 상태를 벗어날 수 없으며, 나는 감옥 안의 수학자가 될 생각은 없다"고 외치며. 갈루아는 점점 더 수학의 이상보다는 현실의 정세에 빠져든다. 그리고 마침내 7월 혁명이 일어난다. 학교에 갇혀 혁명에 참여하지 못한 갈루아는 교장의 이중성을 학교 신문에 공개하고 학생들을 선동한 명목으로 퇴학을 당한다.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뛰어든 갈루아는 루이 필리프가 왕좌에 오른 7월 혁명의 불완전성을 까발리며 좀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가 되어간다. 친구 슈발리에의 권유에 못 이겨 아카데미에 논문을 또 한 편 제출하지만 여전히 코시에게는 아무 소식이 없고, 급기야는 자신의 논문이 분실된 것을 발견한다. '민중의 벗'이란 조직에 가입한 갈루아는 젊고 당당한 데르뱅빌과 함께 행동하기로 결심한다. 루이 필리프를 위협했다는 죄목과 바스티유 해방일의 과격한 무장 투쟁으로 두 번의 투옥을 겪고 건강이 나빠진 갈루아는 요양소에 머물게 된다. 거기서 한 여자를 알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는 데르뱅빌의 약혼자로 밝혀진다. 피할 수 없는 결투를 하기에 앞서 갈루아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다. 다음날 죽을 것을 확신한 갈루아는 친구 오귀스트 슈발리에에게 편지를 남긴다. 자신의 짧은 삶과 그동안의 연구를 담은 길고 긴 편지를…….
방정식의 해법을 찾는 것은 고대 바빌로니아나 중국, 인도인들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리고 3차 방정식이나 4차 방정식의 해법은 이미 16세기 중반에 수학자 타르탈리아와 페라리가 발견한 뒤, 1545년 이탈리아의 카르다노에 의해 발표된 바 있었다. 그러나 그후 많은 수학자들이 5차 방정식 이상의 방정식에 도전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1766년 루피니가 근에 의해 5차 방정식의 해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했지만 그의 증명은 완전하지 못했다. 결국 1824년이 되어서야 노르웨이 수학자 닐스 아벨이 본질적으로 타당한 증명을 해냈으나, 갈루아는 그의 연구 초기에는 아벨의 연구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벨과는 다른 방법으로 5차 이상 방정식의 일반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갈루아는 열여섯 살 때 방정식이 근에 의해 풀리기 위해 만족해야 하는 본질적인 조건들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그의 방법은 방정식의 근에 대한, 허용되는 순열(순서가 있는 배열의 변환)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즉, 오늘날의 용어로 하면 방정식의 근들을 결부시켜 얻어지는 '체'의 자기동형군(특별한 종류의 변환)을 만들었다. 갈루아의 핵심적인 발견은, 근에 의해 해를 얻을 수 있는 필요 충분 조건은 자기동형군이 풀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항상 쉽게 이해되는 구조를 가지는 소수(素數) 차수 성분으로 군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가 풀 수 있다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것이 근에 의해서 해결 가능하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5차 방정식을 2차·3차·4차 방정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갈루아(1811∼1832)의 짧은 생은 1930년 파리에서 일어났던 부르봉 왕정 복구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왕위를 계승하는 험난한 사회상을 배경으로 한다. 그는 1830년 공화군 동조자로 정치적 선동에 참가해 두 번이나 투옥된다. 갈루아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지지자였지만, 갈루아는 원래 공화주의, 무정부주의나 유토피아론 모두를 거부하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살을 계기로 민주 공화정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된다. 급진적 공화주의자이자 수학자였던 갈루아는 1830년 7월 혁명에 적극 가담한다. 혁명 가담자로 체포돼 수감된 뒤에도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사상 전향을 거부하고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해 뒤마나 들라크루아처럼 공화주의자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콜레라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의 연구를 정리하고 수학 철학에 대한 에세이들을 집필했다. 그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군 이론'이라는 새로운 수학 분야를 열었다. 그가 만들어낸 군 이론은 기하학과 대수학을 통일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현재 군 이론은 핵물리학이나 유전공학의 토대가 되고 있다. 군 이론에 기초한 방정식의 갈루아 이론은 완전히 이해되는 데만 7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또한 갈루아는 당시 만연했던 수학 풍토에 반대해 기호나 용어의 남용을 자제했는데,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까지도 수학자들을 자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