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좀 덜 됐을 때는 옳고 그른 것이 있고, 시비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고, 더러운 것이 있고, 성인이 있고, 범부가 있는 등 이렇게 분별을 나누고 할 말이 많아지는데, 공부가 제대로 되면 그것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하권, 84쪽)
선방에서만 선이 살아 있고, 일상 가정에서 밥 해 먹고 청소하고 가족과 대화하는 것은 선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선이고, 거기서 살아 있는 선을 해야 하는데 건너뛰어 버립니다. 건너뛰는 것이 심하다 보니까 부부간에 문제도 생기고 가족 간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선 공부는 내 가정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현실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선을 잘하기 위해서 가정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도된 것입니다.(하권, 327쪽)
이것은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왜 공부하느냐? 일상생활에서 나도 행복하고 가족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하고, 그 힘이 더 커지면 사회에 참여하고 이렇게 법을 잘 쓰고 마음을 큰 틀에서 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하권, 329쪽)
우리는 보통 환경이 달라지면 내가 바뀌고, 사회가 좋아지면 내 살림살이도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밖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내 생활, 행복감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릅니다. 세상이 바뀌어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선은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하권, 369쪽)
[머리말]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괴로울 때에는 꿈을 깨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꿈을 깨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한 일인가? 본래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 또한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괜히 꿈을 꾼 사람이 꿈을 꿔서 깨쳤다고 하는 것이지,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은 그런 것이 귀할 리 없다. 이 모든 일들이 중생 업식을 가지고 중생 업식을 깨치는 일이다. 마치 도적의 칼을 뽑아서 도적을 잡는 일과 같다.
조사선과 간화선의 본래 뜻은 부처가 부처로서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선禪에 대한 정견正見 없이 참선하는 무리들은 ‘참선은 선법문禪法門 듣는 자리나 선방에서만 닦는다’고 생각하고 생활선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일찍이 육조 스님은 『단경壇經』에서 ‘일상생활 속의 그 많은 경계들이 본래 공空한 것인 줄 알고 그대로 잘 알아서 집착심에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잘 쓰는 것[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선禪이라고 했고, 고봉 스님은 『선요禪要』에서 ‘본래 모두 성불해 있으므로 굳이 닦아서 깨닫는다면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올리는 것과 같이 군더더기일 뿐’이라고 일렀다.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는 참선 공부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필독서로서 우리나라 조사선의 전통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봉 스님은 자신의 수행 과정을 토대로 쓴 이 책에서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알고 믿음·분심·의심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 정진하면 누구나 반드시 깨침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조사선과 간화선의 바른 정견正見을 갖추게 되면 일상생활에서의 분노, 갈등, 걱정을 끊어 버리고 본래 맑고 고요한 자리로 돌아가게 되므로 말 그대로 생활 속의 선을 실천하게 만드는 공부라 할 것이다.
간화선 공부라 하면 무조건 접근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불자들이 많다.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법을 펴기 위해 비유와 방편을 활용하셨듯이, 이 책에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상에 기초한 비유를 통해 간화선 수행체계를 쉽게 풀이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앎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지난해 말 생각지 못하게 몸이 상하게 되었다. 신라 고승 경흥 스님의 일화에 ‘선우善友가 병을 낫게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소납 역시 여러 도반과 불자님들의 염려와 도움 덕분에 기운이 돌아왔다.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몇 달간 회복에 힘쓰던 중 오래전 정리해 두었던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 원고를 다시 꺼내어 들었는데 매일의 규칙적인 운동과 원고작업으로 몸과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 사람들과 나누게 되었으니 모든 공덕을 그대 살아 있는 부처님들에게 회향한다.
불기 2558년 여름 저잣거리에서 설 우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