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다른 관점에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정말로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까?” 네,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완전할 때에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데”(김세윤, 28) 인간은 유한하고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허망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오직 “우리 밖에서extra nos, 우리를 위해서pro nobis 구원의 힘이 와야”(김세윤, 29)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배타적이고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김세윤, 58)을 일으키신 이유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Part 1, 구원, p. 21~25
주의 능력의 행사는 “새로운 존재”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벌어지는 이링고,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그 놀라운 능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인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이 구절의 뒷부분, 즉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힘이 없는 크리스천과 기독교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 연민과 자기주장에 사로집힌 ‘버릇없는 크리스천, 버릇없는 기독교’가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에 청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기 부인’입니다. 루이스 역시 책을 마무리하면서 “자기 포기”를 강조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루이스, 340)
- Part 1, 기독교의 핵심, p. 43~44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세상과 관계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earthy 존재가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현실적인earthy 존재가 된다는 말은 현실에 묶여 쩔쩔매는 속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현실을 대면하며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는 것은 그만큼 현세적이지만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단계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감각, 곧 민감함이 생긴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전에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장소와 사물 안에서도 하나님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다. 광야를 통해 참으로 하잘것없는 돌멩이 하나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보는 법을 배운 다윗은 그 어떤 사물도, 그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었다.”(유진 피터슨, 97)
-Part 2, 거룩, p. 101
여전히 의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악을 강력하게 제어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맥 역시 그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소망하는 말을 합니다. “가끔은 당신이 통제해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오두막, 231)
하지만 예수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난 결코 당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힘을 행사한 적은 없었어요. 당신의 선택을 통제한 적도, 당신에게 뭘 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어요. 당신이 하려는 일이 당신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거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라도 말이죠.”(오두막, 231)
이 기막힌 신비를 설명하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외치시던 이 음성이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우리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고통의 현장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악을 허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악이 현재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악으로 인해 일어나는 고통이 하나님께도 고통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들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있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이야기입니다.
-Part 2, 신앙, p. 146~147
헨리가 깨달은 더 놀라운 사실은 ‘가장 교활하고, 분열을 일으키며, 상처를 주는 권력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사용되는 권력”(헨리, 26)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같은 종교의 권력은 우리를 크게 유혹합니다.
“두려움 많고 근심하며 불안해하고 상처받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좌우에서, 여기저기서, 예나 지금이나 제공하고 있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움켜잡고 싶은 유혹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이런 권력들은 우리로 하여금 작은 꼭두각시로 죽을 때까지 줄에 매달려 흔들리며 살아가도록 만든다.”(헨리, 38)
하지만 헨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한 것은 연약함의 힘이었습니다. 그가 “연약함의 신학”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이 강조하는 훈련의 첫 번째는 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헨리, 39)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라르쉬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영적 여정 중에 이르는 ‘평안의 길’을 발견합니다. 특히 라르쉬 경험 중에 그를 변화시킨 강력한 경험은 바로 라르쉬에서 만난 25살의 청년 아담 때문이었습니다.
-Part 3, 연약함, p. 159~160
우리는 그동안 소명을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제한해 생각했습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일과 소명’을 일치시키는 청교도들의 범주화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 기니스는 소명을 다음과 같이 둘로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 받은 것이지, 무엇(어머니의 역할이나 정치나 교직)으로나 어디(도시 빈민가나 몽골)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정주부나 법조인으로 혹은 교직으로 부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이차적인 소명으로서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일 뿐 일차적인 소명은 아니다(.”오스 기니스, 83)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