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구 flypaper@yes24.com
보기만 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를 것만 같은 뉴욕의 여름이 있는 영화 <스모크>. 캐롤송이 아니라, 시력을 잃은 노파의 집에서 카메라를 훔치는 한 크리스마스를 기억하게 하는 영화이다. 폴 오스터의 책을 고급 양장본으로 감싸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열린책들에서 폴 오스터 도서 목록에 거의 막바지 작업에 가까운 두 권의 책을 추가했다. 『고독의 발명』과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그중 『고독의 발명』이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서 다소간 딱딱한 실험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면,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설가의 원숙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Smoke and Blue in the Face : Two Films』를 원제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폴 오스터가 영화 시나리오로서는 처음 집필한 「스모크」와 그 연장선상에서 뉴욕 브룩클린의 일상을 파고 든 「블루 인 더 페이스」두 편의 시나리오에 영화 <스모크>의 직접적인 모태가 됐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묶었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오기 렌이 폴 오스터에게 들려준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스모크>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의 얼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즈음해서 인용하고픈 책 『호밀밭의 파수꾼』. 거대한 트리, 도심을 가르는 스케이트 날, 브로드웨이를 배회하는 어린 영혼들의 우상인 홀든 콜필드. 그저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충실하도록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적어도 외롭다고 징징대지는 않으련만, 갖가지, 그 중 대부분은 쓸데없는 충돌로 번잡해지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모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큰 명절에 제 집을 도둑처럼 숨어 들어야 하는 홀든 콜필드. 폴 오스터에 의해 뉴욕의 담배 가게에서 부활하는 홀든은 본의 아니게 눈 먼 할머니의 집에 숨어 들어 카메라를 훔치는 오기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 <스모크>로 다시 녹아 든다.
뉴욕타임즈에서 크리스마스 특집 콩트를 의뢰 받고, 형식적으로 직조된 따뜻함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할 것 같아 의뢰를 거절하려다 집요하게 설득당한 채 고민에 고민만 쌓아 가던 오스터는 평소 자주 가던 담배 가게 점원 오기 렌에게 `점심 한 끼' 값에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얻는다.
오기 렌이 12년 동안 뉴욕 모퉁이 한 길가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앵글과 노출로 거리의 풍경을 고정시켜 차곡차곡 앨범으로 묶어 왔다는 사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그것이다. 12년 전 오기는 담배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 도망친 한 소년이 떨어뜨린 지갑을 줍고, 쓸쓸한 크리스마스 날, 괜스레 그 소년의 지갑을 돌려 주러 간 아파트에서 오기를 손자로 대하는 눈 먼 할머니와의 크리스마스 만찬에 엮인다. 할머니가 잠든 사이 소년이 훔쳐 장물 삼아 보관해 두었음직 한 카메라를 하나 훔치게 되는 오기, 그리고 오기의 사진과 함께 하는 브룩클린의 일상.
1990년 뉴욕타임즈 크리스마스 특집판에 실린 짤막한 에피소드 속에 폴 오스터는 인생의 슬픔과 기쁨, 우연과 필연, 실재와 환영의 복잡한 과정을 하릴없이 사라지는 담배 연기 속에 담아 놓는다.
가슴 따뜻한 오기 렌의 이야기는 폴 오스터의 시선을 거쳐, 웨인 왕의 제의로 영화 <스모크>로 다시 태어난다. 제목이 암시하듯 담배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상의 소소함과 에피소드를 정교한 퍼즐처럼 직조해, 도시의 한 복판에서 제 나름대로의 상처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엮었다. 이 영화로 웨인 왕은 199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고, 시나리오 작가로서 역량을 확인 받은 폴 오스터는 그후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잡고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크리스마스. 어찌됐든 사람들 사이의 섬이 육지가 되고, 번잡한 만큼 접촉이 많아지는 때. 그만큼 생기는 투명한 추억의 시선으로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무연하게 건넬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오기 렌이 폴 오스터에게 점심 한 끼 값으로 자신의 몫을 풀어 나갈 수 있었듯, 우리 모두 제 몫의 상처와 반성을 훈훈하게 건넬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