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 한국 사회는 지역주의라고 하는 범국민적 차원의 패거리주의에 휘둘려 혼란을 겪게 될 것이 틀림없다. 좋은 학연을 만들기 위한 대학입시 전쟁은 계속 치열해질 것이고 부정부패도 패거리주의의 보호를 받으며 더욱 심해질 것이다. 남북통일 문제도 반드시 이 패거리주의라는 암초를 만나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본문에 실린 「우리 마음과 형태 속의 분단 체제 : 남북통일과 패거리주의」라는 글을 살펴봐주시기 바란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나와 같은 사람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패거리주의 앞에서 진실은 무력하다. 패거리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걸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왜 진실을 향한 갈구를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왜 욕을 먹을 짓을 골라서 하는 걸까? 책 팔아먹는 재미 때문일까?
나는 제 14권에 뒤이어 이 책에서도 지역주의에 관한 글을 또 써놓고도 스스로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나는 개그가 아니라 진심으로 '연고주의 옹호론'의 대열에 동참해야 하는건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왜? 패거리주의에 관한한 나는 한국에서 절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정상'이 '정상'을 공격하는 이 뻔뻔함! 나는 이 '패거리 공화국'의 난민(難民)인가? 그렇게 말하기엔 나는 이 '패거리 공화국'에서 누릴 것 다 누리며 너무 잘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수많은 '난민'들을 위해 발언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들은 사회적 언로(言路)에서 배제돼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외람되지만, 나는 그들을 대변하는 글쓰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머리말 / 패거리 공화국 중에서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실은 거대한 짝짓기 게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새 그렇게 컸다. 우리는 주변의 동료를 물리쳐야 할 경쟁자로 생각하도록 교육받았고, 우리가 졸업 후에 나가서 살아야 할 사회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사각의 정글이라고 배웠고, 그 아비규환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패거리'라는 이름의 짝짓기 게임을 배웠다. 그리고(놀이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수단이라는 널리 알려진 테제를 취하여 말하자면) 아마도 일찍부터 이런 문화에 익숙하게 만들어 아이들이 커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짝짓기 놀이'를 계발해 가르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문화에서는 아이들에게 동료를 친구라 가르치고, 경쟁만이 아니라 동시에 협력을 해야 사회생활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가르쳐도 사회가 존속된다. 사실 모든 생산은 사회적 생산, 일단 사회적 협력이 존재해야 경쟁도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의 바탕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 pp.44-45
박정희와 전두환은 지식인의 생명이라 할 '표현의 자유'를 압살한 독재자였다. 그 생명을 거세당한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무엇이었겠는가. 세상을 등지고 자기의 좁은 영역 안에서 '작은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 성완경이 잘 지적한 '인맥의 카르텔과 이에 기생한 서열화된 촘촘한 먹이사슬'이 그렇게 해서 생겨나고 강화된 것이다.
--- p.64
'문학과 지성', 이러시면 안 된다. 정말 안 된다. 패거리주의와 마피아주의는 문학적이지도 지성적이지도 않다. '문학과 지성' 사람들이 조선일보와 한겨레에서 똑같이 융숭하게 대접받는 것은 그 두 신문 가운데 어느 한 신문이 크게 잘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문학과 지성 사람들도 그렇게 양다리 걸치기를 해도 되는 것인지 겸허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적했다시피 권오룡의 글은 그대로 문학과 지성사에 적용되는 명문이므로 그걸 텍스트삼아 두고두고 반성의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 p.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