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진지하지 않은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기능 중의 하나는 바로 지나치게 진지한 것들에 의혹의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다 ― 바로 이것이 패러디의 중요한 기능이다.
- 〈서론〉, p. 8
만약 심리학적으로 스트립쇼의 관계가 가학-피학적이라면 사회학적으로는 이런 가학-피학성은 현재 수행되고 있는 교육적인 제의에서 기본적 요소이다. 스트립쇼는 좌절을 찾고 또 받아들이는 관객에게 생산 수단은 그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스트립쇼가 사회학적으로 카스트(혹은 계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제도를 분명하게 도입한다면, 형이상학적으로는 본질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쾌락과 소유할 수 있는 쾌락을 비교하게 구경꾼을 이끈다. 자신의 현실과 모델을, 자신의 여성들과 여성성을, 자신의 성적 경험과 이상적인 성을, 그가 소유한 알몸들과 결코 소유할 수 없을 이상적인 나체를 비교하게 된다. 스트립쇼는 이런 무의식적인 조합을 통해 플라토닉한 상황을 타율적이며 억압된 사회학적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정치적 지렛대가 그에게 속해 있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이상의 왕국에 의해 자신의 경험 모델이 허가되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 스트립쇼의 관객은, 현존하는 질서의 튼튼하고 견고한 기둥으로 기능하는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시켜 주는 정화 의식을 치른 뒤 일상의 의무 속으로 평화롭게 돌아간다. 그리고 <크레이지 호스>(수행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선불교 출가자들을 위한 수도원)보다 덜 금욕적인 클럽의 관객들은 쇼에서 본 무희의 사진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들의 헌신과 고독이 권유하는 불경함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조건을 위로하도록 말이다.
- '스트립쇼와 이성', pp. 25~26
양적인 현상의 영역에서 보통이란 평균이라는 뜻으로 이용되며 아직 평균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은 표준을 나타낸다. 널리 알려진 명언에 따르면 통계학은, 만일 매일 어떤 사람은 닭 두 마리를 먹는데 또 다른 사람은 한 마리도 먹지 않은 경우, 이 두 사람이 각각 한 마리의 닭을 먹었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학문이다. 한 마리도 먹지 않은 사람에게 하루에 닭 한 마리를 먹는다는 목표는 그가 열망하는 긍정적인 무엇인가가 된다. 하지만 질적 현상의 영역에서 중간으로서의 평준화는 0으로 평준화되는 것과 같다. <평균 수준>의 도덕적 ? 지적 미덕을 모두 소유한 사람은 발전 단계 중 가장 낮은 지점에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은 <신중함>이라는 분별력 있는 미덕이 바탕이 되어 자신의 열정을 균형 있게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평균 수준으로 열정을 키우고 평균적으로 신중하다는 것은 보잘것없는 인간성의 전형을 의미한다.
- '마이크 본조르노의 현상학', pp. 37~38
마이크 본조르노는 시청자들에게 평범함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생생하면서도 의기양양한 예를 들어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우상으로 비춰지지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답한다. 그는 그 누구도 도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이상을 대표한다. 누구든 이미 그의 수준에 이르러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종교도 자신의 신도들에게 그렇게 너그러울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과 그렇게 존재되어야 하는 것 사이의 긴장이 해소된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이 신입니다. 그대로 계십시오.
- '마이크 본조르노의 현상학', p. 44
우리가 엔리코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면 프란티는 너무 많이 웃는다. 그의 웃음은 정상이 아니며 비웃는 듯한 그 미소는 상투적이고 거의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웃는 사람은 분명 즐겁지 않을 것이다. 혹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웃는 것이리라.
'사랑의 학교'라는 우주에서 프란티는 부정을 상징한다. 하지만 ―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만 ― <부정>은 <웃음>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프란티는 못된 아이이기 때문에 웃지만 ― 엔리코는 이렇게 생각한다 ― 실제로는 웃기 때문에 사악해 보인다. 혹시 웃는 사람의 사악함이 미덕의 한 형태는 아닐까 하는 점에 대해 엔리코는 자문해 보지 않는다. 웃는 모든 것, 프란티의 사악함은 마음이 지배하는 세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엔리코가 번성하고 풍요로워지리라고 생각하는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엔리코는 그 사악함의 위대함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 '프란티에게 바치는 찬사', pp. 53~54
제임스 조이스, '피니건의 경야'
제발, 검토서를 보낼 때에는 좀 더 주의를 기울이라고 편집부에 말해 주십시오. 저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인데 당신들은 다른 언어로 정말 거지같이 쓴 책을 제게 보냈단 말입니다. 책을 소포로 따로 돌려보내 그리겠습니다.
- 애석하지만 출판할 수 없습니다, p. 91
게다가 우리는 조용한 고독이 주는 기쁨을 잊은 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 욕구를 이론화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소위 말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 그리고 다수가 정하는 법을 따르라, 이것이 민주의주의의 계명이다. 자신을 뽑아 줄 사람만 충분히 모을 수 있다면 그가 누구든 어떤 직책이라도 맡을 수 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직책들은 운에 맡겨지게 된다. 우연성이 바로 대중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p. 96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