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지
허순용(sellavy@yes24.com)
연암 박지원은 한국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걸출한 문장가요 사상가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 진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박지원의 문학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우선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열하일기>조차 완역본을 구할 수 없었으며(민족문화추진회에서 나온 것은 오래 전에 절판되었다),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소설 몇 편을 제외하곤 그의 글을 구경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일부 작품이 출간된 경우라도 출판사에 따라 작품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기 일쑤여서 박지원의 전체적 면모를 엿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열하일기>와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는 출간의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열하일기>의 가치는 말을 보태는 것이 사족에 가까울 정도로 탁월한 것이며, 그 번역이나 제작 상태 또한 훌륭하여 높이 칭송할 만하다. 그런데 <열하일기>가 워낙 대단한 작품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가 조명을 받지 못하는 감이 있다. 하지만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도 결코 놓칠 수 없는 귀중한 작품이다.
이 책은 연암의 문집에서 가려 뽑은 90여편의 글을 싣고 있다. 특히 소설은 전 작품 모두 수록되었고, 시13수, 각종 문집 서문과 상소, 논문, 묘지명, 그리고 척독(짧은 편지글)까지 두루 실려 있다. 게다가 책 뒤에는 연암 연보와 원문, 6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전문연구가의 해설까지 붙어 있다. 이를테면 이 작품집은 연암 선집으로서 빼어난 체재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리즈는 북한에서 편집한 것이라 북한 학자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이 책의 번역자가 벽초 홍명희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우리에겐 작은 즐거움이 된다. 북한 학자의 번역은 남한 학자에 비해 진솔하고 구수하며, 오염되지 않은 우리 말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연암의 문학 세계는 한 마디로 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의 비범한 재능은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 혹은 볼테르처럼, 그 시대 뿐 아니라 그 나라 전체를 대표할 만큼 크고 높은 것이다. 그는 말의 군대를 지휘하는 탁월한 장군으로, 힘과 세기,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천재였다. 그는 비유의 달인이었고, 함축, 생략, 숨겨두기의 명인이었다. 엉뚱한 얘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절묘하게 주제와 갖다붙이는 재능에서 그의 오른 편에 나설 자는 없다. 독창성과 자유분방함, 핍진한 묘사와 도도한 논설이 읽는 사람을 거듭 감탄케 한다.
이 작품집은 이러한 그의 풍요로운 표정과 깊은 내면을 담고 있다. 물론 <열하일기>를 읽지 않고 박지원을 논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또 여기 실린 글들을 읽지 않고 그를 논할 수도 없다. 특히 시 <좌소산인에게(贈左蘇山人)>, 박제가의 문집 서문인 <옛 것을 배우랴 새 것을 만들랴(楚亭集序)>, 글을 군대의 진법에 비유한 <몇백 번 싸워 승리한 글(騷壇赤幟引)> 등은 그의 문예미학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한편 그는 유머를 즐기고 신분을 초월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벗들과 술에 취해서(醉踏雲從橋記)> <돼지 치는 사람도 내 벗이라(答洪德保書 第二)> 같은 산문, 기타 척독이나 묘지명에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넘친다. 다만, 선집이다 보니 그랬겠지만, 명편(名篇) 중의 하나인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 빠진 것은 좀 아쉽다.
덧붙여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은 박지원 관련서가 몇 권 있다. 박지원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비슷한 것은 가짜다(정민, 태학사)>는 꼭 읽어보시라. 작품을 전재하고 한번 읽은 다음 분석/해설해 주는데, 박지원의 글이 가진 깊이와 맛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또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있어 일거양득이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돌베개)>도 추천한다. 박지원의 아들이 쓴 <과정록>을 번역한 것인데, 다른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정보가 들어있다. <열하일기 연구(김명호, 창비)>는 절판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서라도 읽어야 할 중요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