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초가 수북이 자라난 들판은 황량했고, 그 위로 거대하고 검은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참호들에는 철조망을 잇는 노랗거나 하얀 고리들이 보였고, 철조망은 실처럼 길게 늘어져 교통호로 이어졌다. 여기저기에서 유령의 손이 올려보낸 것 같은 포탄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오르며 바람 속에서 파르르 떨렸다. 또는 유산탄의 탄알들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하나의 커다란 눈송이처럼 황폐한 불모지 위에 붕 떠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이 음산하고도 우화적이었다. 전쟁은 이 지역에서 사랑스러운 것을 다 지워버리고 그 뻔뻔스러운 특징만을 뚜렷이 새겨서 그 전경을 홀로 바라보는 이를 경악하게 만들었다.---pp.49~50
- 이 전쟁에 참여한 여느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자주 이런 상황에 처했던 나는 이제 이 상황에 딱 맞는 비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말뚝에 꽁꽁 묶인 채 큰 쇠망치를 휘둘러대는 놈에게 연신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 그것이다. 지금은 망치가 놈의 머리 뒤로부터 다시 휘둘러지기 직전이다. 이제 망치가 공기를 가르며 나를 향해 날아온다. 이제 내 머리통이 박살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망치는 말뚝을 후려치고,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튄다. 바로 이것이 총격과 포화 한가운데에 엄폐물 하나 없이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 겪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p.101
- 쑥대밭이 된 전쟁터는 끔찍했다. 살아 있는 방어군 사이에 죽은자들이 누워 있었다. 간이호를 팔 때 우리는 그들이 겹겹이 층을 이루며 쌓여 있다는 걸 알았다. 한 중대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중대가 배치되고, 그 병사들은 집중포화 속에서 한꺼번에 몰살당했던 것이다. 시체들은 포탄이 터질 때 치솟아올랐다가 쏟아져내린 흙더미에 덮였고, 그 전사자들이 싸웠던 자리는 다른 병사들이 메웠다. 이제는 우리 차례였다.---pp.122~123
- 나는 억지로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이젠 더 이상 ‘너 아니면 나’의 상황이 아니었다. 그 뒤에도 나는 그를 자주 생각했고, 해가 가면 갈수록 더 자주 그를 떠올렸다. 국가가 살인의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고는 하나, 우리의 회한까지 가져가지는 못한다. 우리는 슬픔을 감내해야만 한다. 슬픔과 후회는 꿈속 깊이까지 들어와 박혔다.---p.299
- 우리의 검고 하얗고 붉은 마크가 그려진 전투기 편대가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하늘을 갈랐다. 막 저문 해의 빛줄기가 그것을 옅은 분홍색으로 칠해 꼭 플라밍고 무리처럼 보였다. 우리는 하늘의 비행기들에게 우리가 적지 안으로 얼마나 멀리 침투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지도를 꺼내어 뒷장의 하얀 면이 위로 오도록 뒤집어놓았다.---p.308
- 밤에는 사납게 빗발치는 한여름 뇌우처럼 맹렬한 포격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고 나면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상하게도 안전하다는 느낌에 빠져서, 싱싱한 풀을 푹신하게 깔아둔 침대에 누워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벽에서 흙모래가 줄줄 흘러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아니면 밖으로 걸어나가 디딤판에 서서 우울한 밤 풍경을, 광폭한 불놀이와 유령의 저주에라도 걸린 듯한 고요의 기묘한 대조를 바라보았다.
그런 순간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기분이 엄습했다.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랜 기간 동안 낭떠러지 끝에서 격한 삶을 살아낸 뒤에 오는 엄청난 심경의 변화 같았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투 중이었다. 나는 지쳤고, 전쟁의 얼굴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 익숙함이 내 앞에 있는 것을 새롭고 은은한 빛 속에서 바라보게 해주었다. 상황은 이전처럼 눈부시지도 뚜렷이 구별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집을 떠나올 때 간직했던 의미가 다 소진되었음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감지했다. 전쟁은 새롭고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 너무나도 낯선 시간이었다. ---p.321
- 갈색 코듀로이 외투를 입은 형체 하나가 총탄이 휩쓸고 지나간 땅을 침착하게 가로질러 걸어오면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키우스와 보예, 융커 대위와 샤퍼, 슈라더, 슐래거, 하인스, 핀다이젠, 횔레만, 호펜라트는 납과 쇠의 총탄 세례를 받은 생울타리 뒤에 서서, 공격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수많은 분노의 날들을 같은 싸움터에서 보냈고, 이미 서쪽 하늘로 저물고 있는 저 태양은 오늘도 우리 모두의, 혹은 거의 모두의 피를 황금빛으로 빛나게 할 터였다.---p.344
- 이것은 마지막 돌격이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와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석양을 향해 전진했던가! 레제파르주, 기유몽, 생피에르바스트, 랑게마르크, 파스샹달, 뫼브르, 브로쿠르, 모리! 또 한번의 피의 향연이 손짓하고 있었다.
---p.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