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살려 달라고 외쳤을 때, 난 놀라지 않았다. 유치원에 들어간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난 엄마가 아이들이 만든 색색의 마카로니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그런 엄마가 아님을 알았다. 엄마는 날 그저 손이 좀 작은 하인으로 여겼다.
“콜라 갖다 줘, 룰루.”
“동생 시리얼 먹게 우유 갖다 줘.”
“가게에 가서 윈스턴 담배 한 갑 사 와.”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수위를 높였다.
“아빠를 집 안에 들이지 마.”
우리 가족이 와해되던 7월,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난 곧 열 살이 되었는데, 엄마는 날 쉰 살쯤으로 보는 것 같았다. 아빠는 집을 나가기 전에도 가족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기 나름대로 문제가 있었겠지만 아빠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걸 원했고, 다른
무엇보다도 엄마를 간절히 원했다. 어려서부터 브루클린의 매력적인 해변과 유원지가 있는 코니아일랜드 부근에서 성장한 탓에 엄마의 반반한 얼굴에 약한 건 그렇다 쳐도, 나머지 부분은 왜 놓치고 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달콤하게 꾸민 엄마의 겉모습 때문이었는지, 아빠는 엄마가 온전히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을 때면 언제든 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pp.8~9
엄마의 묘지에 솜털 같은 풀이 자라 있었다. 엄마의 묘비 제막 의식이 곧 시작될 참이었다. 루비 할머니가 유대인들은 장례식 때 묘석을 천으로 감싸 덮어 두었다가 일 년 뒤 기일에 돌아와 천을 걷어 낸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난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메리와 함께 엄마의 묘지 발치에 섰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천으로 덮인 묘석 주위에 모여 있었다.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밑에 있을 엄마의 발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엄마는 브루클린에 사는 여자들 가운데 가장 밝은 빨간 색 매니큐어를 발톱에 발랐다. 매니큐어가 엄마의 뼈에 그대로 남아 있을까?
“엄마가 풀 밑에 있는 거야?” 메리가 속삭였다.---p.37
큰 목소리로 소리치고, 날 가게에 심부름 보내고, 저녁을 차려 주지 않고, 매정하게 대하고, 날 이해해 주지 않은 엄마가 싫었다. 엄마가 필요할 때만 날 찾는 게 싫었다.
“동생이랑 놀아.”
“다림질할 거 티니 아주머니에게 갖다 줘.”
“나 살려 줘.”
엄마를 미워했던 나 자신이 미웠다.
내 증오심이 아빠가 엄마를 죽이도록 했을지도 몰랐다. 왜 아빠 등 뒤에서 달려들지 못했던가? 왜 앞에서 달려들지 못했던가? 왜 소리치지 못했던가? 왜 욕실에 숨어서 입도 뻥긋하지 못했던가? 메리는 엄마와 아빠에게 달려갔다. 엄마가 “칼을 들고 있어! 티니 아줌마 불러와! 날 죽이려고 해!”라고 소리치는데도 난 욕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던가? 제대로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내 멋대로 상상하는 걸까? 엄마는 아빠가 죽이려 한다고 말했던가? 나는 왜 엄마 아빠한테 달려가지 않았을까?
아빠가 메리를 죽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빠는 왜 자살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아무도 구하지 않았을까?---p.208
퀸과 나는 12월부터 만나기 시작해 거의 일 년이 다 되었다. 이따금 나는 감정적인 어려움을 깨닫고 그를 내 인생에서 몰아냈고, 그는 일주일 혹은 한 달 동안 내 의사를 존중하곤 했다.
“넌 널 돌봐 줄 내가 필요한 거야.” 그가 자문자답했다. “널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아, 불쌍한 어린 고아 메리.”
불쌍한 어린 고아…….
퀸은 내 실제 삶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상상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아내를 죽인 살인자의 딸보다는 고아가 나았다.
그에게 술잔을 건네주었다. 미키가 물을 섞어서 만들어 주는 것과 달리 진하게 탄 술을 나는 이미 절반이나 마신 상태였다. 술잔을 비우자 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얼마나 취하든 상관없었다. 수십 명과 잠자리를 했지만 룰루 언니와 했던 약속을 깨고 싶은 마음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오래전 나와 비밀 약속을 했던 언니는 드류와 한 번 잠자리를 하고선 그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털어놓아 버렸다. 하지만 그를 만나는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드류 같은 남자와 데이트는 할 수 있다 해도, 내가 그런 남자와 사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드류 같은 남자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p.246
“나도 알아.” 메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말해야 할 거야.”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았다. 아빠가 심장마비에 걸리거나 교도소에서 말싸움을 벌이다 칼에 찔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났지만,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술기운에 취한 메리와 내가 소파에서 서로 애증의 포옹을 오랫동안 나누자, 남편이 와서 우리를 떼어 냈다. 남편은 메리를 문 밖까지 데려다 주었다. 열쇠를 돌리고 메리가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가 집 안으로 들어가 바로 위 마룻바닥을 걸어가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과거의 덫에 걸려 있었다. 마흔한 살과 서른여섯 살인데도 오래전에 끝난 부모의 전쟁에 갇힌 죄수들이었고, 여전히 악몽 같은 기억에 갇혀 있었고,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고, 사람들에게 알린 비밀과 숨긴 비밀이 스치듯 지나갔다.
“잠자리에 들 거지, 여보?” 남편이 거실 문간에 서서 말했다. 메리와 내가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에 지쳤는지 동정 어린 표정이 답답해 보였다.
“갈게요. 금방 갈게요.” 내가 말했다.---p.311
메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다리에 손을 얹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마음이 아팠어. 특히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게 했을 때.”
“하지만 내 딸들이잖아.” 내가 말했다. “네가 진심으로 이해할지도 잘 모르겠어.”
“내 조카들이고 내 가족이야. 난 아이들을 사랑해. 루비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었어.”
“네가 그렇게 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아이들이 모든 걸 알아 버렸어.” 나는 메리가 마시던 브랜디를 마저 마셨다.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언니.” 메리는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언니의 비밀을 발설한 게 아니었어. 루비의 목숨을 구해야 했고, 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어. 가끔은 내가 옳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내가 대답하려 하자 메리가 말을 잘랐다.
“때로는 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정답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어.”
메리는 다리를 꼬며 내 손을 잡았다. “때로는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 해. 함께 결정해야 해. 오늘 일어난 일을 보고 배운 점 없어? 사실을 숨겨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거 배우지 않았어?”
침대로 가서 남편 옆에 누워서 그의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 숨을 내쉬고 싶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배웠어.”
“어떤 사실?”
“세상은 우리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
---pp.442~443